▲ 이종희 변호사(공공운수노조 법률원)

전 정부와 현 정부가 노동정책에 근본적인 차이는 없다고 볼 수도 있지만 노동사건을 주로 맡는 변호사로서 느끼는 확연한 차이는 ‘형사사건의 증가’다. 그리고 집회·시위에 대한 ‘엄정 대처’. 물론 둘은 서로 연결돼 있다.

‘엄정 대처’의 신호탄은 대통령 집무실 앞 집회 금지였다.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 11조에서 설정한 집회의 금지구역 중 하나가 ‘대통령 관저 100미터 이내’인데, 새로 옮긴 용산 대통령 집무실이 대통령 관저에 해당한다는 이유였다. 경찰은 대통령실 앞 집회신고가 들어오는 대로 번번히 금지통고 했지만, 법원은 수 차례 걸쳐 대통령 집무실은 집시법 11조에서 집회를 금지하는 ‘대통령 관저’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럼에도 계속 금지통고가 이뤄졌다. 법원이 뭐라든 계속 금지할 것이고, 집회하고 싶으면 법원의 ‘허가장’을 들고 오라는 태도다. 정부는 ‘법치’를 위해 ‘엄정 대처’한다고 말하지만, 법문언과 법원의 판단은 안중에 없었다.

급기야 헌법재판소에서 경찰이 금지통고의 근거로 삼는 조항(사실은 근거가 될 수 없는 조항이지만)에 대해 헌법불합치결정을 선고했다. 헌법재판소는 집시법 11조에서 규정한 집회 금지구역에 대해 하나씩 헌법불합치 결정을 선고하고 있었는데 그 연장선상이다. 그렇다고 정부가 대통령 집무실 앞 집회금지를 포기했느냐, 아니다. 아직까지 효력을 유지하는 집시법 11조를 근거로 집회 금지통고를 하는 동시에, 집시법 시행령 개정을 시도했다. 집시법 12조는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주요 도시의 주요 도로에서 교통소통을 위해 집회 금지를 할 수 있도록 규정하는데, 대통령 집무실 인근 도로를 이에 포함하는 방법이다.

집시법은 집회를 ‘허가제’가 아니라 ‘신고제’로 규정하고 있는데, 결국 집회는 비용과 시간을 들여 법원의 소송을 통해야만 개최가 가능한 행위가 돼 버렸다. 비용과 시간이 없어 그대로 집회를 진행하다가는 형사사건으로 비화돼 버린다.

노동조합이 주최하는 집회에 대해서는 노조혐오를 부추기며 ‘엄정 대처’를 반복한다. 물대포가 없어서 집회가 난장판이 됐다며 2016년 백남기 농민 사망 이후 사라진 물대포(살수차)의 부활을 외친다. 경찰은 캡사이신 사용도 불사하겠다며 집회 참가자들을 위협한다. 불법 집회 전력이 있는 단체의 집회를 제한·금지하겠다는 집시법상 근거가 없는 집회불허 지침도 발표한 바 있다. 민주노총, 건설노조 등 정부와 각을 세운다고 판단하는 노동조합의 집회는 개최하기 전부터 이미 불법이다.

결국 법을 바꿔서까지 집회·시위의 자유를 가둬버리기 위해 여론의 불판에 집회의 자유를 올렸다. 대통령실이 국민제안 페이지에 올린 ‘집회·시위 요건 및 제재 강화’ 주제의 이른바 ‘국민참여 토론’ 이야기다. 처음부터 집회·시위에 대한 제한과 제재를 강화하기 위한 인기투표라는 말이 많았는데, 결국 ‘추천’이 ‘비추천’의 2.5배 더 많았다.

필자도 해당 페이지에 들어갔다가 줄줄이 달리는 집회에 대한 혐오성 댓글을 보았는데 지금도 기억에 남는 의견이 있다. “흡연구역처럼 집회구역도 만들어주세요.”

헌법에 기본권으로 규정된 집회는 이제 흡연과 같은 존재가 됐고, 정부는 집회를 타인에게 피해만 끼치는 유해한 행위로 인식시키며 이를 최대한 억제시켜야 한다는 기조를 펴고 있다. 헌법재판소의 표현을 빌리자면, 집회의 자유는 의사표현의 통로가 봉쇄되거나 제한된 소수집단이 의사를 표현하고 여론의 형성에 영향을 미치게 해 주는 중요한 기본권이다. 그런데 집회하되 조금도 시끄럽게 하지 말라고 말한다. 고립된 장소에서 누구에게도 피해 끼치지 말고 자기들끼리 의견을 말하면 되지 않느냐면서 그것이 자유민주주의 사회의 집회의 자유라고 말한다.

노동자들은 왜 서울 한복판에 집회하겠다고 모여 행진하는가. 장애인들은 왜 지하철을 타겠다고 모여서 구호를 외치는가. 자본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노동자가 가지는 권리를 집단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비장애인 중심의 사회에서 장애인이 겪는 이동권 제한을 말하기 위해서다. 자기들끼리 의견을 교류하는 것을 넘어 동료 시민들에게 호소하기 위해서다.

다시 헌법재판소의 표현을 빌리자면, 헌법이 집회의 자유를 보장한 것은 관용과 다양한 견해가 공존하는 다원적인 ‘열린 사회’에 대한 헌법적 결단이다. 법치는 이를 보장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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