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건준 아유 대표

혼돈과 끓는점

“뇌 송송 구멍 탁”이라는 2008년에 등장한 문구가 소환됐다. 광우병 소를 먹으면 뇌에 이상이 생길 것이라는 공포를 자극한 이 문구는 15년이나 지난 것이다. 그런데 후쿠시마 오염수로 인한 논란 속에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수족관 짠물을 마시는 이벤트를 벌인 정치인들이 소환했다. 광우병 공포는 비과학적 선동의 결과였을까.

인간은 위험을 감지하면 신호를 보내 종의 유지와 번식에 성공했다. 그래서 불안도 과학이다. 2008년 광우병 반대 시위로 미국산 쇠고기 수입 조건을 바꿨고 불안은 사그라들었다. 시민의 불안을 다스리는 것이 정치다. 지금 과학과 정치는 경계를 잃고 뒤섞인다. 과학은 객관적으로 검증이 가능한 신뢰임에도 정치가 과학을 먹고 과학이 정치에 섞여 신뢰를 잃어 간다.

이건 혼돈일까, 사회적 진화를 위해 끓어오르는 걸까. 냄비에 물을 끓이다 보면 물은 부글대며 거품을 일으키고 수증기가 된다. 물이 끓는점에 이른 것이다. 물만 가득했던 냄비는 물과 거품과 증기가 섞인 상태가 된다. 지금 한국이 이 모양 아닌가. 정치와 과학이 뒤섞여 신뢰를 잃은 순간 중심을 잡을 데모스(시민)에 따라 혼돈인지 끓는점인지 달라질 것이다.

황혼을 맞은 선배 시민은 생존이 중요한 시기를 겪었다. 남은 곡식은 떨어지고 보리는 아직 익지 않아 굶었던 ‘보릿고개’를 경험한 이들을 불붙인 것은 ‘잘 살아 보세’였다. 빈곤 탈출 의지를 모아 산업화로 내달렸다. 지금 권력과 자원을 가지고 황혼 문턱에 선 중년 시민들은 민주화를 통과했다. N포세대에서 MZ세대로 간판이 바뀌고 있는 후배 시민은 지금 여기에서 아우성이다. 후배 시민들은 선배 시민의 ‘생존’과 중년 시민의 ‘성장’을 반복할까, 넘어설까.

세 번째 노동시민

지금 여기에 절실한 것은 ‘성숙’이다. 선배 시민의 빈곤이든 후배 시민의 빈곤이든 그것은 더 이상 보릿고개를 넘어야 했던 과거의 빈곤이 아니다. 지금의 문제를 빈곤 탈출을 위한 생존 욕망이나 더 많은 소유를 위한 성장 욕망으로 해결할 수 없다. 세상의 재화는 넘치지만 양극화로 제대로 나누지 못한 제도적 병폐가 낳은 결과이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이 성숙할 때 사회 제도를 성숙시킬 수 있다. 생존과 성장을 지나 ‘성숙이 필요한 제3시대’가 온 것이다.

생존의 시대에 등장한 색깔론을 소환하고, 저성장 시대에 성장 욕망에 갇혀 성숙을 거부하는 정치는 불안을 치유할 수 없고 제도적 병폐를 고칠 수 없다. 이런 정치권에서 ‘제3지대’가 등장하고 진보정당 일부에서 ‘세 번째 권력’이라는 깃발도 올랐다. 이것은 에너지 가득 품고 끓는 물이 만드는 부푼 희망일까. 공감할 가치를 담은 서사와 조직 기반이 분명하지 않다면, 3이라는 숫자 놀이로 그칠 것이다. 시민은 어떻게 변했고, 어떤 상태에서 어떤 가능성을 품고 있는지를 제대로 알아야 제3시대를 열어갈 데모스를 형성할 것이다.

노동시민은 꾸준히 재구성된다. 2000년대에 들어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확연히 구분되는 것을 목격했지만, 지금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넘어선 비정형 노동이라는 용어들이 자주 쓰인다. 1차 노동시장의 정규직, 2차 노동시장의 비정규직이라는 구분을 넘어선 제3의 노동이 그만큼 늘어났기 때문이다.

세 번째 노조

노동시민 결사체는 재탄생 중이다. 어용노조, 민주노조와 사뭇 다른 제3세대 노조들이 탄생 중이다. 그러나 어떤 신선한 정치도 두 정당의 하나로 흡수되는 양당제처럼, 어떤 신선한 노조도 두 노총의 하나로 흡수하는 양 노총 체제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다. 어용노조와 민주노조를 넘어선 제3세대 노조들은 지속적으로 탄생할 것이다. 계속 늘어나고 있는 제3의 노동이 제3세대 노조를 탄생시키는 물질적 기초다.

제3세대 노조들은 기업노조나 산업노조가 아닌 제3 형태를 보인다. 컨베이어가 깔린 전통적 공장의 집단적 노동이 아니라 플랫폼이 깔린 사회적 공장에서 접속하는 노동, 쪽수를 중심으로 한 노사교섭이 아니라 공감을 기반으로 한 사회적 교섭이나 초기업 교섭, 딱딱한 조직으로 전투 대형을 만들기보다 말랑한 연결을 통해 이슈를 만든다. 이런 노조들은 집단성은 낮아도 사회성이 높아 ‘소셜(social) 유니온’ 모습을 보인다.

물이 끓는다고 모든 물이 증발해 수증기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물은 끓이면 음식을 익히고 섞여 맛있는 국물이 된다. 어용도 민주도 아닌 제3세대 노조들이 제3노총이 되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노동시장에 기반을 둔 초기업 교섭모델과 사회노조 모델로 무늬만 산별인 노조 안에서 변화를 일으키는 촉진자가 될 수도 있다. 유연한 몇몇 산별노조들은 이런 신생노조의 가능성을 볼 줄 알고 키운다.

노조 에너지 전환

여전히 노조의 목표는 고용안정과 임금인상이어야 할까. 이런 질문은 더 이상 탄소를 배출하는 성장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기후위기, 고용관계가 불투명한 노동이 늘어난 현실, 자본주의가 저성장에 접어들어 매년 쭉쭉 임금을 인상하는 것이 물리적으로 점점 어려워질 것이라는 현실에서 나온다.

비정규직 운동이 활발했던 20여년을 거치면서 왜 새로운 노조 모델을 만들지 못했을까. 정규직이 되겠다는 욕망은 결국 안정된 정규직 노조를 닮고 싶은 기성노조 추앙이 아니었나. 그렇다면 그 에너지는 열등감 콤플렉스다. 열등감은 차별을 넘어서려는 동기가 되지만, 열등감에 사로잡히면 새 모델 창조에 이를 가능성이 매우 낮다.

제3세대, 제3유형의 노조들이 핵심 가치로 삼아야 할 새로운 목표는 무엇일까. 분산해 온라인에 접속해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특정 기업에 고용돼 기업이라는 집단에서 소속감을 느끼기 어렵다. 노조로 뭉치고 동료와 연결돼 접촉하면서 소속감을 느낀다. 노조의 목표를 임금인상보다 정이 흐르는 관계로 보는 응답이 압도적인 조합원 설문 결과도 나온다. 물론 기업 이익이 늘고 물가가 오르면 적절한 분배를 요구해야 한다. 그러나 임금이 노조의 핵심 가치는 아니다. 고용과 임금인상이라는 요구는 제거될 것이 아니라 다른 가치를 중심에 둠으로써 재편될 것이다. 특히 저임금 노동자에게 임금인상은 매우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마저 동료들과 탄탄하게 연결되고 깊은 소속감을 가질 때 가능하다.

물질적 성장에서 사회적 성숙으로, 임금인상에서 소속감으로, 물리적 힘자랑에서 자부심과 효능감으로 핵심 가치를 바꾼다면, 이것은 물리적 목표보다 심리적 목표로의 이동이다. 이는 ‘외면의 성장’보다 ‘내면의 성숙’을 핵심 에너지로 삼는 노조의 에너지 전환이다.

소속감이나 공동체 감각이 성장과 소유 욕망을 이겨 낼 만큼 강한 에너지가 될 수 있을까. 인간 욕구에 대한 복잡한 심리학을 들춰 낼 필요는 없다. ‘노동의 종말’은 오지 않았는데 ‘고용의 종말’이 왔다고 한다. 800만에 이르는 특수고용직과 플랫폼 프리랜서 등 고용 없는 노동자는 특정 기업에서 소속감을 느낄 수 없다. 이 소속감의 빈틈을 채울 수 있다면, 노조는 기성노조와 다른 에너지를 얻을 것이다. 화석연료 시대 노조와 재생에너지 시대 노조의 에너지가 같을 이유는 없다.

아유 대표 (jogjun@hanmail.net)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