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현익 변호사 (서비스연맹 법률원)

“지침에서 식당 위치를 설명한 부분을 찾아봐요”

“그건 지침에 없습니다”

“그럼 기지에서 한 번도 밥을 안 먹었나요?”

“아닙니다, 세 끼 다 먹습니다”

“지침에 없는 식당 위치를 어떻게 압니까?”

“시간이 되면 사람들을 따라갔습니다”

변호사들이 군인 의문사 사건의 진실을 파헤쳐가는 과정을 그려낸 법정 영화 <어 퓨 굿맨(A Few Good Men)>의 법정 증인신문 장면에 나오는 대사다.

검사는 상관의 가혹행위 지시 사실을 은폐하려는 의도로, 증인에게 가혹행위(Code Red)와 관련된 규정이 지침에 존재하는지 질문한다. 당연히 지침에 그런 규정이 있을 리 없고, 증인은 가혹행위 규정은 지침에 없다고 증언한다. 검사는 이를 통해 가혹행위가 ‘지침’에 존재하지 않으므로, 상관이 이를 지시하는 행위도 존재할 수 없었다는 주장을 펼친다.

규정에 없으니 지시한 적도 없을까?

이에 변호인은 증인에게 지침에 식당 위치를 설명한 부분이 있는지 반문한다. 당연히 지침에는 식당 위치가 설명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증인은 식사 시간이 되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식당에 방문했고, 세 끼 모두 식사했다고 증언한다. 변호인은 위 증인신문을 통해 ‘지침’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지시나 그에 따른 행위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검사의 주장을 논파한다. 식당 위치가 지침에 명시되어 있지 않다고 식사를 안 하지 않듯이, 지침에 명시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상관의 지시가 없다고 할 수 없다는 점을 역으로 증명한 것이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모두가 하는 이상한 출근

영화 속 장면일 것만 같은 위 장면을, 조기출근이나 휴게시간 미보장에 대한 수당 미지급을 다투는 사건에서는 쉽게 목격할 수 있다. 노동자들이 정해진 출근 시간보다 일찍 출근하고, 실제로 그 시간에 업무 준비를 했음에도 몇몇 사용자들은 명시적인 업무지침이나 지시가 없었다며 이에 대해 임금을 지급하지 않는다.

A병원 교대근무 간호사들은 취업규칙에 명시된 시간보다 일찍 출근하여 인수인계를 받고, 환자 상태 등을 파악하며 업무 준비를 해야 했다. 영화 속 대사에서 지침에 없음에도 다른 사람을 따라가 식당에서 밥을 먹듯, 다른 모든 간호사들이 조기출근을 하고 그래야만 정상적인 업무수행이 가능했기에 당연하게 조기출근 했던 것이다.

하지만 사용자는 조기출근에 대한 임금 지급을 거부했다. 자신들은 조기출근을 지시한 적 없고, 조기출근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징계한 적도 없으므로 이를 업무 지시에 따른 근무라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사측 증인은 법정에서 ‘자발적인 공부 시간을 위해’ ‘간호사의 완벽주의자적인 성향 때문에’ ‘커피를 마시기 위해’ ‘가족 병문안을 위해’ 등의 개인적인 이유로 조기출근 하는 간호사도 다수 존재한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아무도 지시하지도 않았고, 아무도 이를 문제 삼지 않았는데 간호사들은 왜 약속이라도 한 듯이 조기출근을 한 것일까? 그 모두가 단지 개인적인 이유로 잠을 줄여가며 일찍 출근한 것일까?

노동자들은 명시적인 지침이 없더라도 특성에 따른 다양한 업무들을 수행하게 된다. 또한, 당장의 징계가 없더라도 남들이 다하는 일을 혼자서만 하지 않고, 상급자의 지시를 거부하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A병원의 간호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조기출근이 필요했고, 이를 거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사용자는 명시적인 지시가 없었음을 이유로, 이를 간호사들의 자발적인 조기출근일 뿐이라며 임금지급의무를 회피했다.

공짜노동은 없다

법원은 A병원 사건에서 원고들의 청구를 일부 인용하며 30분의 조기출근에 대한 연장근로수당을 지급할 것을 판결했다. 조기출근이 사용자의 지시와 무관하게 이뤄진 것이라는 A병원의 주장을 배척했다. 위 사례는 간호사 조기출근에 대한 임금지급의무를 인정한 최초의 판례로서 의의를 가진다.

여전히 조기출근에 명시적인 지시가 없었다는 이유로 임금을 지급하지 않는 사업장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업무수행을 위해 명백히 필요한 노동에 대해 임금지급을 하지 않는 것은, 명시적인 지시라는 가림막 뒤에 숨어 임금지급을 회피하는 행위다. 근로계약은 호의관계가 아닌 법률관계다. ‘자발적’이라는 핑계로 공짜노동을 강요하는 것은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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