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기덕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1. 이 칼럼은 순전히 지난달 23일 세계일보에 게재된 칼럼에 대한 것이다. 이 나라에서 노사관계 전문가 권순원 교수(숙명여대)의 칼럼 ‘노동조합은 이중구조를 완화하는가’를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이다. 오늘 대한민국에서 노동조합에 대한 비판이 넘쳐나고 있다. 그러니 내가 이렇게 칼럼 하나를 특정해서 시비한다는 게 좀 이상하다고 여길지 모르겠다. 아마도 그 칼럼을 쓴 교수는 분명히 그렇게 여길 것이다. 이상하게 여겨도 할 수 없다. 포털 뉴스를 검색하다가 내 PC화면에 떠오른 탓이라고 말해줄 수밖에 없다. 대단하게 선별한 것은 결코 아니다. 사실 나는 ‘노동조합은 이중구조를 완화하는가’라는 제목에 사로잡혔다.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 당시부터 줄곧 부르짖었던 ‘자유경쟁과 공정’ 논리의 노동(조합)편에 해당하는 제목이었기 때문이다. 칼럼 제목을 읽는 순간 나는 권 교수가 노동조합이 이중구조를 완화하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펼쳤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짐작대로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보자.

2. “계약 시점에서 공급자(노동자)와 수요자(사용자)의 관계는 대등하나, 계약을 맺는 순간 ‘노동력’의 관리와 처분권은 사용자에게 위임된다. 업무와 장소를 지정하는 것, 성과를 관리하고 생산성을 유인하는 것 모두 사용자 책임이다. … 노동력 사용의 배타적 권한이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가 사용자와 근로계약을 체결할 때는 대등한 계약 당사자였으나, 그 계약을 체결한 뒤부터는 노동자의 노동력의 관리 및 처분 권한이 사용자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까지 보면 근로계약관계의 특성 내지 본질에 주목해서 설명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래서 특별히 잘못된 말을 하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노동력에 대한 사용자의 권한을 배타적이라고 강조하면 사업장에서 노동과정에 대한 사용자의 전제적 지배를 인정하게 된다.

칼럼에서 “노동력 사용의 배타적 권한이 주어져 있”다는 부분은 바로 이를 말해준다. 칼럼에서 이 부분에 이어 “사업장 내 취업규칙과 근로계약은 상품 교환의 조건”이라고 쓴 것은 당연한 논리적 전개라 할 수 있다. 여기서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취업규칙이 노동자가 근로계약을 통해서 사용자에게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교환한 조건일까. 이 나라에서 취업규칙은 사용자가 사업장 근로자에 대한 근로조건과 복무규율에 관한 준칙이라고 정의해 왔다. 수십년 동안 반복해서 판결해 온 대법원의 판례법리일 뿐만 아니라, 근로기준법(93조)이 규정하고 있는 취업규칙의 필요적 기재사항을 보더라도 명백하게 그렇다. 근로조건은 근로계약의 내용이다. 임금, 근로시간 등 근로조건이란 노동자와 사용자 사이 체결하는 근로계약 내용인 것인데, 어떻게 교수는 “사업장 내 취업규칙과 근로계약”이 “교환의 조건”이라고 주장하는가. 이 나라에서 정의해온 취업규칙은 결코 근로계약에 따른 교환적 조건의 것일 수가 없다. 근로계약과 교환적 조건 운운하고자 한다면, 취업규칙 중 복무규율에 관한 부분에 한해서라 해야 한다. 이 부분에서도 사용자에게 전적으로 배타적, 전제적 권한이 인정된다는 식의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 노동자는 사업장 노동과정에서 노예로 존재해서는 안 된다. 노동자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행복추구권을 가지는데 노동과정에서도 이를 실현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으로서 존엄성과 행복추구권을 근로계약 체결을 통해서 사용자에게 교환해 줘 사업장에서는 더는 행사할 수 없다고 봐서는 안 된다.

3. “계약상 지위는 대등하지만 힘의 배분은 불균등하다. 이러한 ‘기울기’를 조절하기 위한 헌법적 제도가 ‘노동 3권’이며 그 핵심 수단이 노동조합이다. 노동조합은 자본주의 시장에서 상품 공급자에게 가격 등 공급 조건 담합을 허용해 준 유일한 제도다. 주유소 주인들이 휘발유 가격을 협의해 결정하면 공정거래법 위반이지만, 노동조합이 노동력 가격을 공동 결정해 구매자와 협상하고 근로조건을 흥정하는 행위는 헌법상 기본권이다. 사용자가 거래 조건을 거부하면 단체행동(파업)도 가능하다.” 권 교수가 주유소 주인들과 비교하며 노동조합 및 ‘노동 3권’의 의의를 밝혔다. 경영학 교수의 설명이긴 하지만 굳이 경영학적인 것도 아니고 오히려 경제학적, 법학적인 설명이라 할 수 있다. 노동조합 및 노동기본권에 대한 상식적인 설명이라고 할 수 있다. 계약 자유의 원칙에 따른 일반 민사법적 지위를 가지고서는 노동자들이 사용자를 상대로 하기 어려우니 특별히 노동조합을 조직해서 단체교섭하고 파업 등 단체행동할 수 있도록 보장했노라고 각종 교과서에 써놓고 지겹게 가르쳐서 이런 해설이 식상할 정도로 상식적이다. 이 세상에서 이런 상식적인 설명은 노동조합과 노동기본권이 특별하다는 걸 강조해서 표현한 것이다. 원래는 그렇지 않은데 노동자를 위해서 예외적으로 특별히 보장해준 것이라는 것이다. 당장이라도 감사를 말해야 할 정도로 노동자는 이 세상에서 특별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생각까지 든다. 교수도 그걸 강조해서 쓴 것이다. 과연 그럴까. 정말 이 세상에서 노동자는 노동조합을 조직해서 단체로 교섭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특별히 보장받았다고 감사해야 할까.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조직해 활동하는 걸을 두고서 특별히 보장해줬다고 하는 것인데, 곰곰이 생각해보자. 이 세상에서 태어나면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단체를 만들어 활동할 수 있다. 이걸 특별히 보장했노라고 해설하지 않는다. 결사의 자유로서 이 세상에서 사람의 기본권이고, 대한민국 헌법도 국민의 기본권으로 선언하고 있다. 따지고 보면, 주유소 주인들이 자유롭게 주유소협회 등을 조직해 활동할 수 있듯이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조직해서 활동할 수 있는 것이고, 이것은 자유, 기본권이다. 단지 노동자끼리 사용자를 상대하기 위해서 조직해 활동한다는 면에서 결사의 종류만 다르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노동조합을 조직하는 것 자체는 노동자들이 단체 하나를 만든다는 것이라 특별히 보장해 줄 것도 없고, 이 세상에서 인민의 기본권인 결사의 자유로서 보장돼야 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사용자를 상대로 그 단체로 교섭한다는 것도 자신들의 요구를 내세워 상대방과 협의한다는 것인데 대단하게 특별히 보장받아야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 나는 의문이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요구를 말하고 협의한다는 것, 이 세상에서 사람이 살아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사람이기에 하는 일이다. 노동자들이 사용자를 상대로 한다고 해서 특별하다 할 수 없다. 상대방에게 자신의 요구를 말하고 협의하는 걸 금지하는 것이 특별한 것이라고 해야 한다. 사실 파업 등 단체행동도 대단히 특별한 것이라고 볼 필요가 없다. 권 교수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이구동성으로 특별한 기본권으로 노동자에게 보장해준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파업이란 노동자들이 일하지 않는 것인데, 일하지 않는 것이 특별히 기본권으로 보장해준 것이라고 해야 할까. 본래 파업하면 민형사상 제재를 받을 수 있는 것인데 이를 면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특별히 보장해준 것이라고 반문할지 모르겠지만, 노동자가 일하지 않는다고 해서 민형사 제제를 가한다는 것 자체가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사람이 무슨 자유를 기본권을 가지는 것처럼 노동자로서 일하지 않는 것도 자유로서 당연히 인정돼야 한다고 본다. 다른 노동자들과 함께 그 자유를 행사한다고 해서 자유를 박탈해야 한다고는 보지 않는다. 이렇게 노동조합을 조직해서 교섭하고 파업 등 단체행동하는 걸 살펴보게 되면, 대단히 특별하게 노동자에게 무슨 기본권을 보장해준 것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그저 이 세상에서 노동자로 되는 순간 행사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해준 것이라고 말하면 그만이다.

4. “노동력 공급 조건을 결정하는 제도로서 노동조합은 조직된 내부시장의 근로조건을 향상하며 차별을 완화하지만, 무노조 시장의 희생을 초래한다. 노동조합은 이해관계를 조직해 실현하기 쉽지만, 미조직 개인들의 이해관계는 경쟁 속에서 와해되며, 그 결과 조직 부문과 미조직 부문 간 사회경제적 거리는 점점 벌어진다. 무엇보다 우리 노동조합은 사업 또는 사업장 단위로 조직되며 노동조합의 독점적 지위와 기업의 지불능력이 결합돼 이익의 강고한 카르텔을 형성한다. 이 때문에 조직 시장과 미조직 시장 간 격차가 더욱 확대된다.” 칼럼을 통해서 권 교수가 하고자 하는 말이다. 노동조합이 카르텔을 형성해 조직되지 있지 않는 노동자들과의 격차를 확대하게 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노동조합은 노동시장의 이중구조를 완화하는 게 아니라 강화한다는 말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수시로 타파해야 한다고 말하는 카르텔 집단에 노동조합이 있다는 걸 칼럼은 위와 같이 길게 설명하는 것이다. 노동조합 활동이 조직 시장과 미조직 시장 간 격차를 확대하고, 심지어는 조직 시장의 근로조건 향상이 미조직 시장의 희생을 초래하게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인데, 이 주장 대로면 노동조합 활동은 이권적 카르텔의 전형이라서 제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실제로 프리드만류의 경제학자들은 그렇게 보고서 경제정책과 노동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권 교수도 칼럼에서 그들을 인용하면서 이러한 논지를 펴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윤석열 대통령도 수시로 해온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결과와 원인을 바꿔 놓았다. 의도적으로 사용자 자본의 하는 일을 삭제하고서 마치 노동조합이 하는 일인 양 왜곡하는 주장이다. 노동조합은 조합원을 위해서 활동하지, 미조직된 비조합원을 위해서 활동히지 않는다. 헌법과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등 이 나라에서 법은 노동조합 활동을 그렇게만 보장하고, 그렇지 아니한 활동은 규제하고 있다. 할 수가 없는 걸 해야 한다고 전제하고서 교수는 말하는 것이다. 오늘 이 나라에서 노동조합에 대한 질타나 비난은 모두 이런 식이다. 미조직 시장이 열악하다면 그건 그 노동자를 사용하는 사용자들이 열악하게 지급해서다. 너무도 분명한 말인데도, 이상하게도 언젠가부터 이 나라에서는 노동조합탓으로 몰아왔다. 사용자편뿐만 아니라 노동자를 위한다는 자들까지도 합창을 하다 보니 이제는 온통 노동조합이 문제라고 여기는 지경이 돼버렸다. 그래도 아니다. 이 나라에서 오늘 노동조합이 노동시장의 이중구조를 강화시키고 있다는 비난은 사용자 자본과 (국가)권력이 해야 할 일을 노동조합탓으로 돌리는 말일 뿐이다.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h7420t@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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