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노사관계(AIR) 컨설턴트

2008년 11월 미국 대선에서 오바마 민주당 대통령 후보의 가장 강력한 지지세력 가운데 하나가 전미서비스노조(Service Employees International Union·SEIU)였다. 여기서 ‘전미’(全美)는 영어 international을 번역한 것으로 국제라는 뜻이 아니라, 미국과 캐나다 북미 두 나라를 뜻한다. 미국 노조들의 이름을 보면 international이 달린 경우가 많은데, 미국만이 아니라 캐나다도 같이 조직한다는 뜻이다.

1921년 출범한 SEIU는 미국과 캐나다에서 100개 직업 종사자 190만명이 150개 지역 지부(local branches)를 통해 조직된 미국 최대 노조다. 전체 노조 예산의 30%를 조직화에 쓰는 것을 골자로 하는 ‘조직화 모델’(organizing model)로 유명한 SEIU는 출범 이후 미국노총(AFL-CIO)에 속했다가 2005년 AFL-CIO를 탈퇴해 ‘승리를 위한 변화’(Change to Win·CtW)를 만들었다. AFL-CIO가 ‘조직화’보다 조직 관리와 정치 선거 등 다른 곳에 더 많은 자금을 쓰고 있어 문제가 많다는 게 탈퇴의 명분이었다.

출범 이후 한때 조합원 수가 500만 명에 달했던 CtW는 AFL-CIO를 대체하는 새로운 노총의 위상을 꿈꿨지만, 좋은 시절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지금 CtW의 이름은 ‘전략조직화중심’(Strategic Organizing Center)으로 다시 바뀌었고, SEIU와 함께 했던 트럭운전사노조(Teamsters Union) 같은 대형 노조들이 탈퇴해 이제 SEIU, 농장노동자조합(UFW), 미국통신노동자조합(CWA) 3개만 남아 있다. 더군다나 UFW와 CWA는 AFL-CIO에도 이중 가입했다.

“미조직 노동자를 조직하라”는 구호를 내건 SEIU의 최고 전성기는 조합원수 220만명으로 최대치를 기록한 2008년이다. 당시 조합원의 21%, 약 50만명이 그해 새로 조직된 이들이었다. 언론은 SEIU를 미국 노동운동의 최강자로 치켜세웠고, 노동연구자들도 “미국 노동운동 재생을 위한 최선의 희망”으로 엄청난 찬사를 보냈다.

그 무렵 ‘SEIU 조직화 군단’이 창설되면서 이상주의적 청년 활동가들이 대거 채용됐다. 일상활동의 일환으로 ‘조합원 자원 센터’라는 전화상담 콜센터가 만들어졌다. 노조 지도부와 간부에 다양한 경력과 배경을 가진 이들이 진출했다. SEIU가 추진한 ‘청년’과 ‘기술’과 ‘다양성’의 결합을 두고 “21세기 노조”라는 찬사가 잇달았다.

이에 더해 오바마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종업원 자유 선택법 (Employee Free Choice Act)이 의회를 통과할 것이고, 이렇게 되면 SEIU는 순식간에 1백만명의 새 조합원을 획득할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이 널리 퍼졌다. 2008년 11월 대통령선거에서 SEIU는 오바마 당선을 위해 6천70만 달러를 썼다.

미국에서는 정부 기관인 전국노동관계위원회(NLRB)가 관리하는 종업원 찬반 투표로 노조 조직화가 결정된다. 그리고 사용자들은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의 ‘반노조 선동권’을 가진다. 이런 사정을 감안해 SEIU는 단체교섭 의제의 제한을 요구하는 사용자에게 유화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노조 승인 찬반 투표에서 유리한 위치에 올라서려 했다. 나아가 새로운 사업장의 미조직 노동자에 대한 조직화가 아니라 기존 노동조합이 이미 조직된 사업장을 SEIU 산하로 재조직하려는 노조 간 경쟁도 마다하지 않았다.

노조 분열은 SEIU 내부에서도 일어났다. 조직화라는 미명하에 단체교섭권을 약화시키고 조합원의 참여를 제한하는 데 반발하는 산하 업종노조와 지부에 대해서 중앙 지도부의 ‘신탁통치’(trusteeship)가 이뤄지게 되었다.

SEIU는 빈곤층, 이민자, 소수자 등 ‘모두를 위한 정의’라는 자유주의적 가치를 내세우면서 사회적 이상주의자들의 지지를 이끌어 냈지만, 그로 인해 역설적으로 노조 내부의 “관료적 중앙통제”가 강화되면서 “노동자 민주주의 운동으로서 노동운동”을 강조하는 흐름이 타격을 입게 됐다. 지도부에 가까운 간부들의 노조 공금을 횡령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SEIU의 빠른 성장이 “윤리와 민주주의를 대가”로 한 “정복”이었다는 비판이 거세졌다.

2009년 1월 오마바가 대통령에 취임하고 민주당 우위의 의회가 출범했지만, SEIU가 불씨를 당긴 “노동조합들의 전쟁”은 계속됐다. 그 여파로 오마바가 선거 공약으로 내세웠던, 노동자들의 단결권을 개선한 내용의 종업원자유선택법과 공적 성격을 강화한 건강보험법은 입법이 좌절되었다.

한때 SEIU가 선도했던 ‘조직화 모델’은 ‘서비스 모델’과 대비되면서 한국에서도 많은 관심을 끌었다. 2005년 CtW의 등장은 기성 미국노총인 AFL-CIO를 대체하거나 미국 노동운동을 양분할 것이라는 전망이 제기되기도 했다. 하지만 20년이 흐른 지금 미국 노동운동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고, 20년 전과 비교할 때 미국의 정치사회 체제는 더욱 퇴행했다.

지금 시점에서 돌아보면 SEIU의 ‘조직화 모델’은 별다른 실천적 의미가 없는 낡은 노선으로 전락한 것은 아닐까 싶다. 가장 큰 이유는 SEIU의 조직 형태는 일반노조지만, 기업 수준의 노조활동과 노사관계에 집착하는 기업별 노조주의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업 차원의 조직화에 몰두한 반면, 기업을 뛰어넘는 노조 조직과 단체교섭에 대한 전망을 내놓지 못했다. 무엇보다 ‘모두를 위한 정의’라는 미명으로 소수자와 다양성을 위한 사회운동 캠페인 조직처럼 운영되면서 노동자운동의 중심성을 놓친 것도 아쉬운 대목이다. 21세기 초 한 시대를 풍미했던 ‘SEIU 운동’을 두고 미국의 노동운동가 스티브 얼리(Steve Early)가 “신시대 노동운동의 탄생” 아니라 “구시대 노동운동의 마지막 발악”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흥미로운 분석이다.

아시아노사관계(AIR) 컨설턴트 (webmaster@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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