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혜경 노동법 박사

모스크바 삼상 회의 결정을 둘러싼 신탁통치 논쟁

모스크바 삼상 회의 결정에 대해 동아일보가 “미국은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소련은 신탁통치를 찬성한다”고 오보를 내면서 1945년 8·15 이후의 정국은 신탁통치를 둘러싼 심각한 좌익·우익세력 싸움으로 번진다. 따라서 8·15 이후 미군정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정을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신탁통치에 대한 실질적인 미국과 소련의 태도 나아가 좌익세력과 우익세력의 모스크바 삼상 회의 결정에 대한 태도를 이해해야 한다.

1945년 12월16일 미·영·소 3개국 외상은 모스크바에서 회의를 열고 12월27일 조약문서에 서명한 후 모스크바 시간으로 12월28일 오전 6시 발표했다. 모스크바 결정의 중심 내용은 ‘조선임시정부 수립’이다. 그것도 민주적 원칙에 바탕을 둔 발전을 이룩하고 일본 지배로 참담한 결과를 제거하기 위해 임시민주정부를 수립한다는 내용이다. 탁치결정 그 자체가 중심은 아니었다. 오히려 신탁통치에 관한 내용은 임시정부를 구성하는 내용의 일부분으로 조선임시민주정부와 협의를 거쳐 작성하고, 4개국의 공동심의를 거쳐야 한다. 협의에 따라 신탁통치를 실시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시기도 5년 이내로 단축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동아일보의 명백한 왜곡보도가 모스크바 삼상 회담이 진행 중이던 1945년 12월27일 나왔다. 오보의 주요 내용은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점령’이다. 미국은 즉시 독립을 주장하고 소련은 신탁통치를 주장했다는 반소논리의 전형을 보여준다. 모스크바 삼상 회담의 내용을 ‘신탁통치안’으로 국한시켜 보도하는 등 삼상 회담 결정의 요체가 조선임시정부의 수립이었다는 것을 왜곡했다.

신탁통치안은 오히려 미국의 구상이다. 1943년 카이로회담 이전에 이미 식민지에서 독립될 지역의 전후처리 방침으로 부상한 신탁통치를 1942년 루스벨트 대통령이 정책대안으로 채택했다. 루스벨트는 아시아에서 해방된 국가는 자치능력이 부족해 ‘교육을 통한 준비기’를 거쳐 독립을 달성해야 한다는 관점을 견지하고 있었다. 신탁통치안의 일방적 주도자인 루스벨트가 1945년 4월 사망한 이후 취임한 트루먼도 1945년 5월 홉킨스를 특사로 파견해 소련과 회담을 벌였는데 여기에서도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 방침을 확인할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참전 이후 초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던 미국은 자신의 세력 팽창 가능지역인 태평양에서 소련과 중국을 견제함으로써 일국의 독점을 방지하고 자국의 이익 확보를 위한 조치로 신탁통치안을 구상했다. 이때까지도 소련은 한국에 대해 별다른 요구를 하지 않았다. 신탁통치 실시 자체에 대해 반대하지 않는 대신 실시기간이 짧을수록 좋다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결국 동아일보의 왜곡보도는 일반인들에게 신탁통치는 독립과 대치되는 개념이라는 논리를 갖게 해 신탁통치 찬성은 매국의 길이요, 민족분열의 길이며 신탁통치 반대는 자주독립의 길이요, 민족통일의 길이라는 환상을 심었다.

모스크바 결정은 한국 문제의 유일한 해결방안이었기 때문에 신중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중경임시정부측은 귀국 전부터 자신들이 과도정부의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민당 등 국내 우익은 좌익의 인민공화국에 대항해 자신의 친일적 색채를 감추기 위해 중경임정을 적극 지지했다. 공산당은 한민당-이승만 세력을 친일파로 보고 공격하면서 모스크바 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등 각 정파간의 심각한 대립으로 나타났다.

공산당측이 모스크바 결정을 지지한 것은 첫째, 연합국(특히 소련)이 한국한테 해로운 결정을 했을 리 없다는 것 둘째, 지금 한국에서는 연합국의 도움이 필요하고 카이로회담에서 적당한 시기에 독립을 주겠다고 약속한 것이 최장 5개년 이내로 확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노력에 따라서는 5년 이내에도 독립이 올 수 있다고 하는 것인데, 이런 태도를 보면 공산당의 입장을 ‘찬탁’이라고 부르기보다는 ‘모스크바 결정 지지 세력’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

어쨌든 친일파들은 반공투쟁에 반탁투쟁을 결합해 적극적인 반탁투쟁을 전개해 민족반역자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애국자로 행세할 수 있었다. 반탁운동의 지도자들은 임시정부를 구성하기 위해 활동하던 미소공위를 파괴하려 했다. 임시정부가 구성되기도 전에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전개해 한반도 문제해결을 위한 유일한 국제 합의인 모스크바 삼상 회담 결정은 파괴된다.

이 당시 미군정의 태도는 실제 신탁통치를 포기하고 반공적인 남한만의 창출을 위해 적극 행동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결국 미국의 의도대로 신탁통치 포기,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으로 이어졌다.

5·10 남한 단독선거와 남한 단독정부 수립

미소공위가 휴회되자 남한에서는 테러와 반소·반공 분위기가 커졌다. 지방을 돌던 이승만은 1946년 6월3일 전북 정읍에서 “지금은 남조선만이라도 정부가 수립되기를 고대”한다고 말함으로써 남한에서 단독정부를 수립할 의도를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한편 미국은 미소공위가 휴회된 9월 소련에 한국 문제를 유엔에 넘기자고 제안했다. 미국이 소련과 한 약속을 어기고 남한 단독정부를 세우려는 목적을 드러낸 것이다. 국제적인 비난을 회피하려고 유엔을 이용한 것이다. 소련은 즉각 반대 의사를 표시했다.

하지만 미국 영향권 아래 있던 유엔은 1947년 11월14일 인구비례에 따른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선거를 감시하려고 미국이 지명한 7개국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 유엔한위)을 만들었다. 1948년 1월8일 유엔한위가 남한에는 들어왔으나 소련과 북한은 거부하고, 결국 유엔은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인정하게 된다.

남한만의 단독선거 실시에 이승만과 한민당의 극우세력만이 찬성했다. 그 외의 모든 정치세력은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민족을 분열시키고 분단을 초래할 것이라며 완강히 반대했다. 단독정부 수립 반대투쟁에는 남로당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이 주도적으로 참여해 2·7 파업과 5·8 총파업을 벌였다. 1948년 4월3일 제주도 4·3항쟁이 발생하기도 했다. 특히나 대한민국임시정부 추대운동을 벌이면서 적극적인 반탁투쟁에 앞장섰던 김구도 남한만의 단독선거에 반대해 김규식과 남북협상을 제안했다. 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의 4인 요인회담 결과 ‘공동성명’이 발표됐다. 공동성명서의 내용은 첫째, 미소 양군의 즉시 철군 둘째, 북이 외군이 철수해도 내전이 일어나지 않을 것을 다짐 셋째, 통일정부 수립 방안으로서 전조선정치회의를 소집해서 임시정부를 수립할 것과 보통선거에 의해 입법기관선거를 실시, 헌법을 제정해 통일정부 수립 넷째, 남한의 단독선거 단독정부수립 반대였다.

그러나 극우세력을 뺀 모든 정당과 민중들이 단독선거를 반대했는데도 미군정은 5·10 단독선거를 끝내 실시했다. 김구, 김규식이 참여하지 않았다. 미군정의 극렬한 탄압을 받던 좌익세력이 배제된 채 선거가 진행됐다. 무소속 85석, 이승만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가 54석, 한민당이 29석, 대동청년단이 12석, 민족청년단이 6석을 차지했다.

제헌국회는 헌법을 만들고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뽑아 대한민국정부가 세워졌다.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자 북한도 8월25일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를 거쳐 9월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하게 된다.

김구나 김규식 세력까지 배제한 채 극우세력만이 참가한 단독정부는 대다수 민중의 민족적 열망이었던 친일파를 척결하기는커녕 오히려 철저히 친일세력이 중심이 된 정부였다. 다수의 농민과 대중들이 가장 중요하게 바라던 ‘토지개혁’에 무관심한 채 지주와 친일파 이익만 보장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 남한에 단독정부가 들어선 것은 자주적 독립국가 건설이라는 민족적 과제와 일제로부터 축적된 경제적 수탈구조를 철폐하려는 민중의 과제가 실패로 돌아갔음을 의미했다.

노동법 박사 (laborkyu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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