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건준 아유 대표

“기존 노조 개념으로 접근하면 안 됩니다”

플랫폼 노동자를 조직하는 일선에 있는 그는 이렇게 강조한다. 산업화 시대 노동과 디지털 시대 노동이 같을 수 없다. 흔한 사업모델이 된 플랫폼은 새로운 노동을 만들어 왔다. 알고리즘이 작동하는 플랫폼 노동에 적합한 조직과 운영원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현장을 뛰는 사람들이 더 절실하게 느낀다.

“임금 줄 돈이 없으니 전임자도 두기 어렵습니다” 헌법과 법률이 보장하는 노조할 권리는 문구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노조 업무를 전적으로 담당한다는 말 그대로 전임자(全任者)가 필요하다. 전임자는 근로시간을 면제받고 노조 활동을 한다. 대한민국은 근로시간면제 한도를 법으로 못 박아 제한한다. 그 한도 안에서 근로시간을 면제받은 전임자를 두되 임금은 사용자가 준다. 하지만 플랫폼 노동자에는 이것도 어렵다.

“우리는 직장이 없어요. 직업이 있을 뿐입니다” 결코 비정규직으로 ‘퉁’ 칠 수 없어 프리랜서, 특수고용, 비정형 노동을 비롯한 다양한 이름이 있지만 이들 상당수가 직장이 없다. 온라인으로 업무를 받아 일하는 사람은 고정적으로 출근하지 않는다. 잠깐 특정 일터에 출근해도 그곳이 직장은 아니다. 디지털 콘텐츠를 만드는 작가, 배달 라이더, 대리운전 기사, 프리랜서 예술인 등 직업은 있지만 직장은 없다. 노조 전임자 임금을 책임질 사용자도 잘 안 보인다.

“예술이 아니라 공장 노동이라고요”

웹툰 작가들은 스스로를 창작 예술가가 아니라 ‘공장노동’에 빗대 얘기한다. 구글, 네이버를 비롯해 웹툰을 올리는 플랫폼 사업자가 원청이고 중간의 에이전시가 하청업체라면 납품해야 하는 작가들은 하청업체 노동자다. 더 빠른 생산을 위해 누구는 스토리를 구성해 그림을 만들고 누군가는 배경이나 인물의 색칠을 하는 쪼개진 공정들에서 장시간 저임금 노동을 한다. 디지털 콘텐츠 노동 현실을 고발하는 웹툰 작가들은 ‘디지털 콘텐츠 창작’이 ‘공장노동’이 됐다고 강조한다.

이들 얘기에 플랫폼 노동을 이해할 힌트가 있다. 산업화 시대와 다른 디지털 시대라는 매우 현대화된 세상에서, 플랫폼이라는 매우 세련된 것처럼 보이는 사업모델이 확산한다. 디지털 콘텐츠 창작이라는 매우 세련된 것처럼 보이는 직업을 가졌지만, 산업화 시대 공장과 양극화 시대 외주화가 섞인 짬뽕 노동이다. 공장이라는 과거와 디지털이라는 현재가 뒤섞인 이것을 뭐라고 얘기할까. 생각 끝에 ‘사회적 공장’을 떠올랐다.

전통적 공장은 컨베이어벨트가 깔려 있지만, 사회적 공장은 플랫폼이 깔려 있다. 전통적 공장은 담이 있지만, 사회적 공장은 담이 없다. 전통적 공장에 생산하는 직원이 있지만, 사회적 공장에 생산자와 소비자가 뒤섞여 있다. 배달 음식을 받아먹고 대리기사를 부르는 우리는 ‘사회적 공장’ 안에 있다. 이 때문에 전통적 공장 노동자는 집단성이 높고, ‘사회적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사회성이 높아 보인다. 전통적 공장은 같은 시간에 출근하고 모여서 일하지만, 사회적 공장은 각자 있는 곳에서 흩어져서 일한다. 전통적 공장은 물건과 사람과 대면하는 ‘접촉 노동’을 하지만, 사회적 공장은 온라인을 통한 ‘접속 노동’을 한다.

공장과 사회적 공장은 다르지만,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고, 사업자는 그곳에서 이윤을 남기며, 노동자는 그곳에서 일한다는 점에서 같다. 공장과 사회적 공장으로 단순하게 나뉘지 않는다. 대규모 공장을 쪼개 전국에 분산시킨 공장도 있고, 전국에 뿌려져 있지만 각 센터에서 집단으로 일하는 서비스센터나 콜센터도 있다. 전국에 뿌려져 있지만 고정된 장소인 지점에 한 명이 일하는 제빵업계도 있다. 모여서 일하지만, 취업이나 작업지시를 온라인으로 하고 접속을 중심으로 관리하기에 노동자 관계가 약한 물류센터도 있다. 공장과 사회적 공장, 그리고 이 둘이 여러 비율로 섞인 공장들에 노동시민이 있다.

공장 탈출 끝은 다시 공장

수렵·채집 시절 인류의 직장은 숲과 들판이었다. 농경을 시작한 인류의 직장은 논과 밭이었다. 산업혁명과 함께 인류의 직장은 공장과 사무실로 바뀌었다. 대량생산과 함께 대규모 공단과 대공장들이 수많은 사람의 직장이 됐다. 이제 새로운 일터인 ‘사회적 공장’이 생겼다.

웹툰 작가들이 자신의 노동을 “공장 노동”이라고 할 때, 공장 노동은 어렵고 피하고 싶은 일이라는 생각을 깔고 있다. 서로 연대하는 노동자들이 있는 공장을 방문한 콜센터 노동자들이 공장을 불편하게 여겼다는 일화를 들었다. 자신들은 도심 빌딩 숲 사무실에서 일하면서 차려 입고 치장하며 공장 노동과 ‘구별짓기’를 하지만, 콜센터는 공장보다 험한 ‘닭장’에 비유되곤 한다. 기획하고 스토리를 쓰는 것은 물론 출연자 섭외에서부터 심지어는 커피까지 타는 방송 작가들은 스스로를 “잡가”로 표현한다. 막내 작가 얘기를 들으면 ‘시다’가 떠올랐다. 시다는 봉제공장 견습공이다.

부모들이 나처럼 살지 말라고 도시로 유학 보냈던 베이비붐 세대는 자식들이 공장 노동자로 살지 않기를 바라며 사교육비를 퍼부었다. 부모 찬스가 있거나 ‘운빨’이 좋아 노동시장 상층이나 ‘사’자 직업을 얻어 공장탈출에 성공할 수도 있다. 굳이 공장에서 탈출하지 않고 노조를 잘 만들어 좋은 대우를 누리는 ‘갓술직’ ‘킹산직’이 될 수도 있다. 재벌 대공장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공장탈출’을 꿈꾸던 많은 시민이 ‘사회적 공장’에서 일한다.

사회적 공장을 어떻게 조직할까

인간은 개념 없이 못 산다. 보통 시민은 개념 논쟁을 하지 않으며 현장 노동자들이 개념을 잘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서로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 그들 직업 세계의 전문 개념을 듣게 된다. 이런 노동자들을 만나 듣고 배우며 ‘사회적 공장’을 떠올렸다. 상세한 내용을 공유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개념을 쓰면, ‘뭔 소리야’하는 반응이다. 소통에는 개념이 필요하다. 그러나 익숙하지 않은 개념어를 쓰면 소통이 막힐 수 있다. 그럼에도 새로운 노동을 배우기 급급한 상황이고, 상세한 내용을 얘기할 수 없으니 개념을 들이댔다.

“과거의 노조 개념 가지고 안 됩니다” 영세한 도심 제조업 노동공제회를 만들어 노조 활동을 개척하는 산별노조 간부 얘기다. 사양산업이 아니라 버젓이 도심 곳곳에 스며든 제조업을 공제회라는 방식으로 조직하는 것도 전통적 노조 개념과 다르다. 오래된 산업이지만, 곳곳에 흩어져 ‘사회적 공장’의 모습을 띤 도심 제조업에도 신개념 노조가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과거 노조와 같은 쪽수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대리운전노조 간부 얘기다. 정말로 그럴까. 사회적 공장의 노동자들은 접속은 많지만 접촉이 약하다. 노동자들 관계가 너무 느슨하고 조직력도 약하다. 접속에 익숙한 문화대로 온라인 소통을 통해 이슈를 만들고 사회적 교섭까지 가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여론이 식으면 사용자도 발 뺀다. 지속가능한 노동조건 개선이 어렵다.

노동 3권에서 ‘자주적 단결권’이라는 결사의 자유가 제일 먼저인 이유가 있다. 뭉치지 않으면 목소리를 낼 수 없고, 지속가능한 교섭도 안 된다. 우리 노동이 얼마나 비참한가를 호소하는 것을 이해하지만, 그것을 극복하려면 뭉쳐야 한다. 문제는 사회적 공장에 맞는 연결 방식이다. 눈 먼 연애는 위험하다. 서로를 잘 알아야 안전하고 깊어진다. 연결되지 않은 노동을 연결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사회적 공장’의 특징을 정확히 이해할 때 길이 활짝 열릴 것이다.

아유 대표 (jogju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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