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인혜 안전관리 노동자

울산 고속도로 톨게이트가 보이는 왕복 6차선 도로가 있다. 도로 한 면은 넓은 논과 밭이 위치했다. 6월 이맘때쯤이면 모내기를 마치고 파릇파릇한 벼가 자라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올해부터 이 풍경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됐다. 논두렁에는 공사장 가림막이 쳐졌다. 기존 논밭은 엎어진 자리에 공사를 알리는 푯말과 공사장 출입구가 설치됐다. 이제 이 곳에 울산 첫 공공병원이자, 산재 전문병원이 들어설 것이다.

“역동의 산업수도 울산”이라는 캐치프레이즈처럼 울산은 중화학공업과 제조업 중심 도시다. 국내 4대 정유사 중 2곳의 생산공장이 있고 세계 최대 조선소와 세계 5대 자동차 브랜드의 핵심 사업장이 위치한 도시다.

당연히 산재 사고가 끊이질 않는다. 조선소에서 떨어져 죽거나 다치고, 화학공장에서 유독가스 마시고 쓰러지거나 화재로 중증도 화상을 입는다. 자동차 부품 공장에서 손가락이 잘리고, 지게차나 덤프트럭에 치이고 깔리는 일이 심심찮게 터지곤 한다.

하지만 지역 내 의료 인프라는 이를 따라가지 못했다. 프레스기에 손가락이 잘린 노동자는 차로 2시간 떨어진 대구 소재 병원에서 접합 수술을 받기도 한다. 주말 근무 중 화학공장에서 화재폭발 사고로 3도 화상을 입은 노동자는 부산의 화상전문병원으로 옮겨졌다. 밀폐공간 작업 중 유독가스를 마신 노동자는 울산이 아닌 창원 병원에서 의식을 되찾았다. 아무리 안전보건 조치를 강화했다 한들, 산업 특성상 이런 사고는 최소 1년에 수십 건씩 발생하곤 한다.

광역시 승격 20년이 넘었지만 사실 광역시 승격 이전, 국가산업단지로 지정됐을 때부터 당연히 있어야 할 산재 공공병원은 없었다. 지역 내 민간병원과 이웃 도시의 의료 인프라에 의존해왔다. 당연히 50년이 넘는 세월 골든타임을 놓친 산재 피해 노동자도 많을 수밖에 없다. 누군가는 불구가 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일터에서 퇴근하지 못했다. 타 도시에 있는 차가운 영안실 어딘가에서 가족을 기다렸다. 또한 죽거나 다치지 않아도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청력이, 호흡기가, 어깨와 허리 근골격계 질환으로 퇴직금의 상당수를 병원비에 쓸 수밖에 없었다.

지역 노동계에선 2003년부터 산재 전문 공공병원 설립을 정부에 요구했다. 이에 따라 이명박 정부 시기부터 박근혜 정부까지 산재모병원 설립을 공약으로 내세웠으나 지지부진했다. 번번이 예산 타당성 조사에서 고배를 마셨다. 경제성을 충족하지 못한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국가산업단지가 밀집한 산업도시에서 산재 대응 공공의료 인프라가 없다는 중요한 문제를 단순히 수익성의 문제로만 바라봤다. 당연히 초기 요구에 비해 병원 규모는 계속 쪼그라들었다. 500병상에서 400병상으로, 그러다 다시 300병상 수준으로 축소됐다. 공사비용 역시 마찬가지다. 4천억에서 1천700억원까지 줄어들었다. 그러다 2019년 문재인 정부 당시 각 지자체 숙원 사업에 대한 예산 타당성 조사 면제를 발표했다. 그제야 300병상 규모, 공사비용 2천300억원 수준의 산재 전문 공공병원이 들어설 수 있게 됐다. 또한 향후 이용 상황에 따라 환자가 늘어날 경우를 대비해 확장한다는 계획도 포함됐다.

산재 전문 공공병원이 들어서면, 산재 노동자가 신청해야 할 서류 처리가 간소화된다. 근로복지공단 직원이 상주하기 때문이다. 또한 재활에 필요한 보조 기구와 치료비용 부담이 줄어든다. 체계적인 재활 치료까지 병행할 수 있기에 산재 피해 노동자가 안정적으로 현장에 복귀할 수 있다. 또한 거시적으로 보면 산재 예방 대책 수립을 지역 내 민간병원에 전적으로 의존하면서 생기는 사각지대를 줄일 수도 있다. 가장 산재가 빈번한 5~49명 사업장처럼 여력이 부족한 사업장들이 산재 공공병원을 통해 지원받을 수 있다. 그만큼 산재 예방부터 산재 발생시 대응, 치료 후 직장 복귀까지 체계를 마련할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난제가 있다. 공공병원 의사 부족 문제다. 전국 공공병원의 69%가 의사가 부족하다. 아무리 고임금을 제시해도 의사가 오지 않아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심지어 은퇴한 의사가 복귀하는 경우까지 있다. 비인기학과일수록 더욱 심하다. 산재 전문 공공병원이 개원하더라도, 의료인력 확충에 어려움이 예상된다. 이 문제는 단순히 울산시 차원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만큼, 의료인력 확충을 위한 다양한 접근이 필요하다.

노동현장에서 안전관리자와 보건관리자를 고용해 산재와 직업병 예방을 위해 아무리 노력한다 한들, 산재나 직업병으로부터 완벽하게 벗어날 수 없다. 더구나 관련 연구와 제도 개편, 판례를 통해 산재 인정 범위가 조금씩 넓어지고 있다. 안전·보건관리자만큼이나 산업재해 대응을 위한 공공 의료인력 역시 필수적이다. 특히 화상이나 유해 화학물질 노출로 재해가 발생하면, 재해자를 치료할 전문 의료 인프라와 숙련된 전문 의료인력은 더 중요하다. 중앙정부 차원에서 지방·공공의료 인력부족 문제를 심도있게 다뤄야 할 때다.

안전관리 노동자 (heine0306@gmail.com)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