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서초구 대법원 청사 전경.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노동위원회 구제명령의 적법 여부가 불복 절차(재심·행정소송)에서 확정되지 않은 기간에 사용자가 구제명령에 반하는 업무를 지시했을 경우 노동자가 이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징계해고한 것은 정당성이 없다는 대법원의 판결이 나왔다. 구제명령이 확정되기 전이라도 효력이 인정되고, 구제명령 미이행시 사용자에게 이행강제금을 부과하도록 정한 근로기준법(32·33조)의 취지에 따른 판단이다. 징계 정당성에 대한 구체적 판단기준을 제시한 첫 사례다.

회사 두 차례 ‘부당전보’ 판정 미이행
직원은 연속 정직처분에 업무지시 거부

20일 <매일노동뉴스> 취재에 따르면 대법원 2부(주심 민유숙 대법관)는 울산 소재의 동서석유화학 전 직원 A씨가 중앙노동위원회를 상대로 낸 부당해고구제 재심판정취소 소송 상고심에서 지난 15일 원고 패소로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쟁점은 ①노동위의 구제명령에 반하는 사용자의 업무지시를 노동자가 거부했는데 ②판결이 확정돼 구제명령이 취소됐을 때 ③업무지시를 거부한 행위에 대한 징계가 정당한지다. 대법원은 법원이 구제명령이 잘못됐다며 노동위 판정을 취소했을 경우 구제명령에 반하는 업무지시를 거부한 행동을 징계사유로 삼을 수 있는지를 심리했다.

이번 소송도 원직 복직의 구제명령을 회사가 이행하지 않으면서 시발점이 됐다. 2011년 입사해 생산팀에서 근무한 A씨는 2013년 4월 ‘연구개발팀’으로 전보됐다. 그런데 이듬해 9월 상사와의 말다툼 과정에서 멱살을 잡고 유리컵을 던져 정직 3개월의 징계가 내려졌다. 회사는 A씨를 ‘경비실’로 보냈다.

A씨는 2015년 2월 부산지방노동위원회에 구제를 신청했다. 부산지노위는 징계처분은 정당하다면서도 전보발령은 부당전보로 판단했고 그대로 확정됐다. 사측은 그해 5월 A씨를 연구개발팀으로 다시 복직시켰다. 이후 연구개발팀은 품질관리팀으로 명칭이 변경됐다.

징계는 또다시 이뤄졌다. A씨는 원직복직 이후 3층에 컴퓨터가 없다는 이유로 1층에서 대기하다가 2015년 8월에서야 본래 자리에 앉았다. 리포트를 제출하라는 팀장 지시에 응하지도 않다가 회사 규정을 그대로 복사하기도 했다. 그러자 사측은 같은해 10월 정직 1개월의 징계를 하고 A씨를 ‘시스템관리팀’으로 보냈다.

A씨는 재차 노동위원회로 향했다. 지노위는 징계와 전보가 모두 정당하다고 봤지만, 중노위는 ‘부당전보’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회사는 2016년 7월 A씨를 ‘생산1팀’으로 전보했고 A씨가 이를 거부하자 ‘시스템관리팀’에서 계속 근무하도록 했다. 연구개발팀(품질관리팀)→경비실(부당전보)→시스템관리팀(부당전보)의 두 차례 전보가 이뤄진 것이다.

구제명령 위법 취지 ‘취소’ 확정되자 징계해고
대법원 “구제명령 취소 이전 징계, 사정 따져야”

문제는 ‘시스템관리팀 전보’에 대한 중노위 판정에 회사와 A씨가 불복하면서다. 법원은 전보가 정당하다며 중노위 판정을 취소했다. A씨가 징계가 부당하다며 낸 소송에서도 1·2심은 징계처분이 적법하다고 판결했고, 2017년 6월 확정됐다. 그러자 회사는 △팀장·과장의 업무지시 거부 △교육 참석 거부 △근무 태만을 사유로 2017년 7월 징계해고했다.

징계사유 대부분은 전보 이후 1심 판결(2017년 3월) 전에 일어났던 일이다. A씨는 ‘부당해고’라며 세 번째로 노동위원회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지노위는 2017년 해고사유가 인정되고 징계양정도 적정하다며 구제신청을 기각했다. 중노위도 초심을 유지하자 A씨는 2018년 3월 소송을 냈다. 1·2심은 정당한 징계사유에 해당한다며 사측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대법원 판단은 달랐다. 근무 태만을 제외한 나머지 징계사유는 구제명령에 반하는 업무지시에 대한 거부행위라고 봤다. 구제명령에 대한 사용자의 즉각적인 준수 의무를 부과하는 근로기준법 규정과 제도 취지를 고려했다. 대법원은 “사용자가 구제명령에 반하는 업무지시를 하고 근로자가 그 지시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징계하는 것은 구제명령이 당연무효라는 등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정당성을 가진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특히 업무지시 후 구제명령을 다투는 재심이나 행정소송에서 구제명령이 위법하다는 이유로 취소가 확정된 경우 전후 사정을 살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법원은 “업무지시 당시 구제명령이 유효한 것으로 취급됐다는 사정만으로 업무지시 거부행위에 대한 징계가 허용되지 않는다고 볼 수는 없다”면서도 구제명령 제도의 취지를 고려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대법원은 구체적인 기준을 제시했다. 구제명령의 취소가 판결로 확정됐다면 구제명령 효력이 소급해 상실하기 때문에 ‘징계 정당성’을 판단할 때는 △업무지시 내용과 경위 △거부행위의 동기와 태양 △구제명령을 내용으로 하는 재심판정의 이유 △쟁송 경과와 구제명령이 취소된 이유 △구제명령에 대한 근로자의 신뢰 정도와 보호가치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구제명령 취소 이전의 징계처분을 전부 정당하다고 봐서는 안 된다는 취지다.

▲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구제명령 보호가치 등 ‘구체적 판단기준’ 제시
법조계 “근로기준법 취지 따른 합리적 결론”

A씨의 경우도 구제명령에 반하는 업무지시를 거부했으므로 구체적인 사정을 따져야 한다고 봤다. 대법원은 “구제명령을 취소하는 1심 판결이 선고되기 전까지는 구제명령을 신뢰해 행동한 원고에게 책임 있는 사유가 없다고 볼 여지가 많다”며 “1심 판결이 선고되기 전에 있었던 업무지시 거부행위들의 경우에는 업무지시 내용과 경위, 거부행위의 동기 등 사정을 아울러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원심이 구체적인 사정을 심리하지 않은 채 징계사유를 모두 정당하다고 판단했다는 지적이다.

그동안 하급심에서 판단은 엇갈렸다. 한양대가 직원 3명에 대한 부당전보 구제명령을 이행하지 않자 직원들이 업무 복귀를 거부해 파면된 사건에서 1심은 징계사유가 되지 않는다고 봤지만, 항소심은 파면이 부당하다면서도 근무 명령은 정당하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2021년 10월 심리불속행 기각으로 원심을 확정했다. 하지만 본안 심리 없이 상고가 기각돼 명시적 판단은 없었다. A씨 사건에서 대법원은 노동위의 미확정 구제명령의 효력과 관련해 구체적 판단기준을 마련했다.

법조계는 근로기준법 조항의 문헌적 해석에 따른 합리적 결론이라고 평가했다. A씨를 대리한 고윤덕 변호사(법무법인 시민)는 “사용자가 구제명령에 대해 불복 절차를 진행하면서 구제명령에 반하는 업무지시를 하고 이를 노동자가 거부했다는 이유로 재차 징계하는 경우가 있다”며 “대법원은 불복 절차가 진행 중이더라도 구제명령에 반하는 사용자의 업무지시를 거부한 노동자에 대한 징계는 원칙적으로 정당성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설령 나중에 불복 절차에서 구제명령이 취소되는 경우라면 구제명령에 대한 노동자의 신뢰 정도와 보호가치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징계의 정당성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고 함으로써 구체적인 판단기준을 제시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