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해배상 대법원 판결 당사자와 변호인, 손잡고 활동가 등이 19일 오전 서울 중구 민주노총 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입장을 밝히고 있다. <정기훈 기자>

‘노란봉투법’ 취지를 살린 것으로 평가받는 지난 15일 대법원 판결 이후에도 손해배상 소송을 당한 당사자들의 고통은 계속될 것이라는 목소리가 높다. 노동자 개인에 대한 손배 책임을 엄격히 판단해야 한다고 보는 등 의미 있는 진전을 이뤘지만 ‘불법파업’에 따른 막대한 배상 책임의 무게를 여전히 노동자들이 짊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노란봉투법’이라 불리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2·3조 개정안이 신속히 통과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다.

시민단체 ‘손잡고’와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지부장 김득중)는 19일 오전 서울 중구 민주노총 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번 대법원 판결은 기업의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된 손배소송을 제한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면서도 “불법파견·정리해고 파업을 불법으로 인정했다는 한계가 있다”고 밝혔다.

파기환송 됐지만 여전히
손배 고통에 떠는 노동자들

대법원 3부(주심 노정희 대법관)는 15일 현대자동차가 금속노조 현대차비정규직지회와 조합원 4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부산고법에 돌려보냈다. 쌍용차가 금속노조를 상대로 낸 손배청구 소송에서도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에 돌려보냈다. 이는 국회 본회의 표결을 앞둔 ‘노란봉투법’ 취지에 부합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다만 대법원은 2009년 쌍용차 옥쇄파업이나 현대차 비정규직의 CTS(도어탈착) 공정 점거농성 자체는 불법이라고 봤다. 파업 이전에 쟁의행위의 원인이 된 정리해고나 불법파견이 있었다는 점은 고려되지 않았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장석우 변호사(금속노조 법률원)는 “정리해고를 반대하는 파업이 정당한지, 원청의 교섭 거부에 대한 하청노조의 파업이 정당한지를 판단하지 않았다”며 “단지 점거를 했다는 이유로 위법한 쟁의행위로 봤다”고 지적했다.

현행법상 ‘합법파업’의 범위가 지나치게 좁은 탓에 ‘불법 딱지’에서 벗어나지 못한 노동자들은 손배소송의 고통도 여전하다고 호소했다. 현대차 정규직으로 비정규직 투쟁에 연대했다가 20억원의 손배 소송을 당한 엄길정씨는 “10년 넘게 시간이 지났지만 당사자들은 (압류로) 재산을 본인 이름으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심적 고통이 심각하다”며 “비정규직이 불법파견 문제에 대한 교섭을 요청해도 현대차는 출입조차 못하게 막으며 이를 거부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11월 대법원이 쌍용차 옥쇄파업 당시 경찰의 과잉진압에 대한 노동자 저항을 ‘정당행위’로 인정하며 사건을 고법으로 돌려보냈지만 경찰은 파기환송심을 다퉈 보겠다는 입장이다. 김득중 지부장은 “국가폭력 피해 당사자들은 이제라도 긴 국가폭력의 시간을 끝내기를 바라고 있다”며 “KG모빌리티 또한 노조에 대한 손배소송을 철회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교섭 요구→거부→쟁의행위→손배청구’
악순환 막으려면 대통령 거부권 행사 안 돼

현대차와 쌍용차만의 문제도 아니다. CJ대한통운 택배노동자들은 택배요금 인상분 배분 문제를 두고 원청에 교섭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 2021년 12월부터 파업을 했다. 이 과정에서 CJ대한통운 본사 점거농성을 했는데 사측은 100억원에 달하는 손해를 입었다며 노조와 노조원 88명에게 20억원 규모의 손배소송을 제기했다. 지난 1월 CJ대한통운이 노조법상 사용자에 해당한다는 서울행법 판결 이후에도 교섭 테이블은 마련되지 않았다.

‘교섭 요구→거부→쟁의행위→손배청구’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노조법 개정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손잡고 집계에 따르면 쟁의행위의 원인 중 단체교섭·단협 관련 사안이 가장 많았고 해고와 집회, 불법파견, 노조파괴·부당노동행위가 뒤를 이었다. 원·하청 교섭이 불가능하고 쟁의행위 범위가 지나치게 좁은 상황에서는 불필요한 사회적 갈등이 양산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노조법 2·3조 개정 운동본부 공동대표인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국회는 대법원 판결을 디딤돌 삼아서 계류 중인 노조법 개정안을 제대로 통과시켜야 하고, 대통령은 더 이상 거부권 행사를 운운해선 안 된다”며 “노동자들이 빈 테이블 앞에 서서 눈물 흘리고 손배 소송 앞에서 피 흘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이날 대법원은 판결을 둘러싸고 정·재계 비판이 이어지자 이례적으로 입장을 냈다. 대법원은 김상환 법원행정처장 명의로 낸 입장문에서 “재판 과정에서 제기됐던 법적 쟁점들과 판결 내용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심중한 검토가 전제되지 않은 채 판결의 진의와 취지가 오해될 수 있도록 성급하게 주장하거나 재판부를 구성하는 특정 법관에 대해 과도한 인신 공격성 비난을 하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다”며 “사법권 독립이나 재판절차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훼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자제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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