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동물 중에 인간만이 자아를 성취하고, 더 나아가 자아를 초월하고자 하는 꿈을 꾼다. 이는 직업(노동)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다. 직업은 삶을 영위하기 위한 수단으로 탄생했다. 하지만 현대 문명사회에서는 인류 공동체를 위해 공급자 또는 소비자로서 유일한 ‘나’만의 역할이 직업이다. 인간으로 태어나 성장하는 과정부터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모두가 직업인이다. 인간이라면 평생 ‘잡(자아) 디자인’이 필요한 이유다. 40년 경력의 직업전문가가 8회에 걸쳐 잡 디자인을 위한 설계도를 보여준다. <편집자>
 

▲ 이연복 협동조합 더나은내일 이사장
▲ 이연복 협동조합 더나은내일 이사장

공동체에서 서로 존중하면서 모두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역할을 다하는 것이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보람되고 행복한 삶이 아닐까? 이를 위해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어깨를 기대며, 손을 맞잡고 서로 부족한 점을 보완한다. 그러면서 예측할 수 없는 미래의 위협으로부터 우리 모두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 공동체를 구성하고 그 속에서 의무와 책임을 다하고 있다. 이러한 일상을 자유의지로 유지할 수 있는 권리가 진정한 권리일 것이다.

이런 구성원(국민)의 권리가 보장되지 않은 이유는 민주주의가 훼손되거나 위협받기 때문이다. 그 요인은 첫째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국가 권한의 권력, 둘째 자본의 권력화. 셋째 특정 집단의 권력화, 넷째 빈곤이랄 수 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구성원 각자가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것, 이것이 곧 권리 행사다.

첫 번째와 네 번째 요인은 주권자인 국민이 국가 운영에 필요한 경비를 충당할 납세의무와, 국민 대신 국가를 운영할 공무원을 선출하는 권리를 행사해야 예방된다. 혹여나 탈세나 체납했다면 자신 신고·납부가 답이다. 참정권은 만 18세 이상 국민에게 주어지는 자율적 권리지만, 이는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책임이다. 이를 해태했다면, 그리고 △진영논리나 일반적 관용을 적용해 범죄자 △혈세를 착복한 자 △사회적 무리를 일으킨 자 △스스로 지도자라 칭하는 자 등 부적격자가 재선출 되는 데 한 표를 행사했다면 반성해야 한다. 후세를 위해서도 말이다.

두 번째 요인을 막으려면 우리 스스로가 자본의 노예가 되지 않아야 한다. 신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자본이 없으면 하고 싶은 일을 다 할 수 없고, 자신의 자유의지와는 상관없이 출생 환경에 지배되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사람의 노동력은 살 수 있어도 사람의 인격과 사랑은 살 수 없듯이, 자본으로도 할 수 없는 일이 인간의 가치를 지키는 일이다. 또한 출생 이후의 환경은 자유의지로 극복할 수 있다. 직업인으로서 활동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고 자아 초월을 꿈꾸면서 말이다. 인간이 자본의 노예로 전락하는 순간 인류는 파멸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이렇게 외형적으로 드러나고 구성원 모두가 인지하는 문제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관심과 참여로 위험을 회피할 수 있다. 하지만, 세 번째 요인인 특정 집단들의 권력화는 공동체 사회의 발전에 저해될 뿐 아니라 분열과 분쟁을 초래할 우려가 있는데도 특별한 자정 기능이 없어 큰 문제다.

지난달 “순익 30% 성과급 나눠 주고 상여 900% … ○○차 노조 역대급 요구안 확정”이라는 기사를 접했다. 순익 30%의 성과급을 전체 직원수로 나누면 1인당 3천400만원이고 정년도 64세로 늘려 달란다며 임단협이 순탄치 않을 것으로 전망하고 타 자동차업체에 미칠 우려를 나타냈다. 노동의 가치는 어떠한 가치보다도 중요하다. 따라서 기업의 성과에 대한 노동자의 배분 요구는 정당한 권리다.

하지만 사내하청 노동자, 부품생산 협력업체 노동자 등과의 심각한 임금격차를 방치한 채 자신들만의 권리만 요구한다면, 자본과 결탁해 취약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결과적으로 미래세대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지 않는 결과를 낳는다.

자동차기업은 자동차 리콜, 급발진 의심사고 등에 대한 사과는 하지 않고 있다. 국산품 애용이 국가에 도움이 된다는 것은 오래전 생각일 뿐이다.

간호사법 제정과 의대 정원 확대 등에 대해 의료계가 반발하는 가운데 “5세 아이, 어린이날 응급실 5곳 돌다 입원 못 하고 사망” “12개 병원 ‘못 받는다’ 138분 길에서 ‘표류’하다 숨졌다”는 기사를 접했다. 이에 대해 의료계는 침묵한다. 방송 드라마 <낭만닥터 김사부>나 <슬기로운 의사 생활>처럼 사람 중심의 의료체계는 희망일 뿐일까?

우리 공동체는 종교의 자유를 천명하고 국교로 특정 종교를 지정하지 않았다. 종교와 정치를 구분하기 위한 것이다. 신자들의 심리적 안정과 공동체의 안녕에 기여하고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공동체가 위급할 때 앞장서서 구원하는 역할이 진정한 종교의 모습일 것이다.

또한 정체도 알 수 없는 단체들이 시민운동이라며 우후죽순으로 생성해 국가 보조금으로 연명하면서 진영논리에 빠져 선전·선동하며 공동체를 분열과 반목의 혼란에 빠트린다.

이제 우리는 “미래를 예측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미래를 만드는 것”이라는 피터 드러커의 명언을 소환하자. 아픔을 겪고 있는 청년·청소년·유아들의 미래를 이들 스스로가 만들어 가도록 지원하자. 기성세대의 바람직하지 못한 직업관은 버리고 정비를 통해서 말이다.

그 직업에서 최고가 되고자 하는 욕구와 추구는 아름다운 것이다. 하지만 그 최고의 자리에 올라 그에 어울리는 의무와 책임감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면, 처음부터 최고가 되기 위한 욕구를 버리던가 다른 직업을 선택하라. 직업의 세계는 인간을 위한,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직업이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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