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혜경 노동법 박사

미군정과 행정관료기구

남한에서 미점령권력은 1945년 9월9일 조선총독이 태평양방면 미육군총사령관 맥아더(Douglas MacArthur)의 대리인인 남조선 주둔 미군사령관 하지(John Reed Hodge) 중장에게 항복한 그 시각부터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맥아더는 이날 ‘조선 인민에게 고함’이란 포고 제1호, 제2호, 제3호를 발표했고 맥아더의 포고 제1호는 38도 이남의 모든 통치권과 행정권이 맥아더사령부의 군정하에서 시행된다는 것을 밝혔다. 따라서 인민공화국이 불법단체가 되는 것은 물론 중경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조차도 주권을 행사할 수 없어서 미군사령부만이 남한지역내에서 배타적이고 유일한 주권체가 됐다.

이렇게 남한 내 유일한 주권체가 된 미주둔군에게 핵심적인 문제는 점령권력의 지위를 확보한 미군정이 권력기구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다. 미군정의 통치기구 재편성 기본원칙은 주둔군사령관의 통제가 용이한 ‘중앙집권화’다. 일제 식민지 통치기구는 그들의 목적상 가장 적합했다. 미군정행정기구는 1945년 10월15일 총독부를 조직적 자원으로 철저히 활용· 재편해 만들어졌다. 미군정 행정기구는 일제 식민지 통치기구를 더욱 중앙집권화된 형태로 재편했을 뿐만 아니라 행정관료들을 구 식민지 관료들과 한민당계 극우세력으로 충원했다.

미군정장관의 관료 충원 방식은 영어구사력과 높은 교육수준 뿐만 아니라 미국 자유주의 이념을 옹호하는 친미 성향을 가진 인물이다. 공산주의와 관계있는 한국인들을 배제했다. 공개채용방식이 아니라 추천 방식으로 충원했다. 일제 시기 독립운동을 한 대다수 민족해방운동 운동가들이 좌익성향으로 파악돼 관료 충원에서 배제됐다. 결과적으로 일제 총독부의 친일관료들이 대거 등장했다.

미군정하에서 행정관료들은 지주층과 친일 관료집단을 중심으로 한 구미 유학파들을 망라하고 지주, 친일집단, 일제 관료층을 기반으로 한 한민당과 이승만의 진출로 이어졌다.

미군정과 군정경찰

군정경찰은 가장 먼저 재편된 국가기구다. 1945년 8월15일 전후 주요하게 국내 질서유지에 기여한 ‘건국준비위원회’ 산하 자생적 치안단체들을 해체시키고 일제 식민지 경찰기구를 활용하면서 등장했다.

주한 미점령군 사령관 하지 중장의 고문이었던 월리암스 대령이 한민당 수석총무인 송진우를 비롯한 원세훈, 조병옥 등 한민당 수뇌부와 요담해 반공사상에 철저한 인물을 군정경찰 수뇌부로 추천해 줄 것을 부탁했다. 송진우는 한민당의 총무인 조병옥을 추천해 1946년 1월4일 군정 경무국장으로 정식 발령을 받아 군정경찰의 조직· 간부충원을 주도했다. 조병옥과 함께 군정경찰 수뇌부에 오른 장택상은 1946년 1월16일 수도경찰청장에 임명됐다. 그도 한민당 요원으로 수도경찰의 조직과 활동을 주도했다.

경찰기구 수뇌부 산하 ‘주요 간부직’ 충원도 유사하다. 조병옥과 장택상이 군정경찰의 수뇌부에 임명된 후 경찰기구 산하 주요 간부직이 충원되고, 그 결과는 경위급 이상 간부 1천157명 가운데 82%(949명)가 일제 치하 총독부 경찰 출신으로 채워졌다.

결국 군정관료기구 요직과 마찬가지로 군정경찰도 한민당계 인물들이 장악한다. 미군정이 남한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응집력 강화하고 좌익에 철저히 대항할 만한 세력을 요구하면서 기존의 식민지 경찰구조와 한국인 경찰관들을 재활용하고자 했던 의도만 작용한 것은 아니다. 일제에 봉사한 한국인 경찰관과 친일 보수집단의 생존욕구(그들은 친일파를 추방하거나 처벌하려는 일체의 정치집단이 권력을 장악하지 못 하도록 막아야 했다)가 결합해 나타난 결과다. 군정경찰은 이후 치안유지 차원을 뛰어넘어 1946년의 10월 항쟁을 성공적으로 진압하는 등 남한 내 저항운동을 와해시키는 데 적극 기여했다.

군정경찰 조직이나 충원 방식을 고려해 군정경찰의 특성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군정경찰은 군정 통치기구 가운데 최대 물리적 강제력을 갖는 국가기구다. 수동적인 치안유지의 차원을 뛰어넘어 좌익세력을 철저히 배제하고 탄압하는 적극적·능동적 기능을 수행했다. 둘째, 해방 후 전국에서 조직된 자생적인 치안단체를 흡수하는 방식이 아닌 오히려 그것을 해체했다. 식민지 경찰기구를 자원으로 활용하면서 철저한 하향식의 조직특성을 보였다. 셋째, 군정경찰 수뇌부가 주로 친일· 보수우익의 한민당계 요인들로 형성돼 친일· 보수 우익세력의 ‘정치적 이해’의 실현에 긴밀한 활동들을 전개했다.

미군정과 조선국방경비대

미군정이 미군정 초기부터 국방경비대 창설을 서두른 배경은 남한 내부 혁명세력 견제 때문이다. 국방경비대를 창설한 결정적 계기는 1945년 10월15일 발생한 남원 사건이다. 군정경찰과 미전술부대가 남원의 인민위원회 및 국군준비대와 충돌하면서 빚어진 사건이다. 경무국 초대차장인 아고(Reamer T. Argo) 대령은 전북경찰국장 김응조와 만나 경찰을 지원할 경찰예비대의 창설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1945년 10월31일 군정청 경무국장이자 점령군 사령부의 헌병사령관인 쉬크(Lawrence E. Schick) 준장이 군대 창설을 건의했다. 11월10일 쉬크 준장을 책임자로 해 연구장교단을 편성· 군대 창설안이 작성된다. 이후 미점령사령부와 군정당국의 군대창설 계획이 진행되지만 맥아더 사령부와 미본국합동본부가 반대했다. 대안으로 미국합참본부가 1945년 12월20일 하지 사령관에게 수정안을 보내 군대 창설 대신 소규모 ‘경찰보조기구’를 만들도록 했다. 새 국방사령관 참페니(Arthur S. Champeny) 대령을 임명, 그의 국방사령부 고문인 이응준에 의한 뱀부 계획(Bamboo Plan)이 수립된다. 1946년 1월15일 경기도 태릉에 제1연대를 창설하는 것을 필두로 해 조선국방경비대가 조직됐다.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점은 미군정기 행정관료기구, 경찰기구와 마찬가지로 조선국방경비대 충원 방식이다. 결과부터 보자면 국방경비대의 간부 대다수는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자들로 채워졌다.

이렇게 된 원인은 첫째, 미군정이 국방경비대 간부와 통역관 양성을 위해 실시한 ‘군사영어학교’에 좌익계 군사단체인 ‘국군준비대’와 ‘학병동맹’이 참여를 거부하고, 광복군은 임시정부 정통성을 주장해 응시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친일파와 함께 참가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군사영어학교 입교자 대부분이 일본군·만주군 출신자였기 때문이다. 둘째, 국방사령부의 한국인 고문으로는 일본군 출신 이응준과 만주군 출신 원용덕이 발탁됐는데 이들이 군사영어학교에 일본군과 만주군 경력자들을 대거 추천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방경비대의 간부충원방식을 고려한 국방경비대의 특징을 정리한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 국방경비대는 남한의 혁명세력을 진압하기 위한 주요한 목적에서 조직됐고 이러한 국방경비대가 이후 한국 군대조직의 기초가 됐다. 둘째, 해방 직후 사설 군사단체로는 좌익계·광복군계·우익계 군사단체가 존재했는데, 좌익계 군사단체인 ‘국군준비대’는 규모가 크고 강력했지만 미점령 특성상 용납될 수 없어 창군 과정에서 철저히 배제됐다. 그 결과 국방경비대의 하향적 조직특성이나 다수 기층 대중과 유리된 조직적 특성으로 나타난다. 셋째 국방경비대 간부 충원이 일본군· 만주군 계열의 군출신자로 충원되면서 일본군 출신 장교들을 한국군의 주력으로 전환시킨 것과 동일한 결과가 됐다.

노동법 박사 (laborkyu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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