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CI 대산공장 전경.

“국가의 안전망과 16년간 다녀온 회사의 정의를 믿었던 행동이 매우 후회스럽기만 하다. 회사의 징계는 가해자 분리가 아니라 감봉 4개월이었다. 사건 당일부터 매일 술에 의존해야 잠을 이룰 수 있고 꿈에서 가해자와 싸우거나 회사 동료들이 가해자 편에서 저를 질타한다. 이겨 내기 어려워 정신과 진료도 받고 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당당한 가해자의 모습이 떠올라 증오와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내가 완력이 부족해서, 과오가 있어서 아들뻘 되는 동료 후배들이 보는 앞에서 발가벗은 채 수모를 당한 게 아니다.”

화장품 첨가물을 생산하는 KCI 대산공장에서 일하는 강아무개(48)씨는 고용노동부 서산출장소 직장내 괴롭힘 심의위원들에게 보내는 호소문에 이렇게 썼다. 공장에서 18년가량 일한 강씨는 지난 3월10일 저녁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개XX, 욕먹어도 싸다”며 스마트폰으로 때려

14일 <매일노동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강씨는 3월10일 금요일 저녁 11시30분께 공장 내 샤워장에서 샤워를 마치고 나오다 상급자인 박아무개씨를 마주쳤다. 박씨는 강씨가 교대근무 퇴근시간 전에 샤워했다는 이유로 벌거벗은 채로 탈의실 내에 세워놓고 “개XX” “욕을 들어먹어도 싸다”는 등의 폭언을 쏟아 냈다고 한다. 또 스마트폰으로 강씨의 쇄골을 찍어 밀치는 등 폭력까지 행사했다. 다수의 동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강씨는 15분 넘게 폭언과 폭력에 시달렸다. 그와 함께 근무한 후배는 박씨의 폭언·폭력이 무서워 샤워장 안에서 역시 벌거벗은 채 나오지 못했다. 강씨는 설비를 청소하고, 페인트 작업 등을 하느라 샤워를 먼저 했다고 말했지만 욕설과 폭력은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수모를 당한 강씨는 같은달 13일 직장내 괴롭힘과 성희롱으로 박씨를 사용자에게 신고했다. 이튿날 화섬식품노조 KCI지회(지회장 김종민)도 사측에 신속한 조사와 징계, 사고 재발 방지를 요구했다. 직장내 괴롭힘 규정에 따라 즉각적인 분리조치도 요구했다. 그러나 무엇 하나 이뤄지지 않았다.

지회에 따르면 사용자쪽은 경찰조사 등을 핑계로 가해자 분리조치를 미루더니 달을 넘겨 4월7일에야 징계위원회를 열었다. 지회 주장에 따르면 이 사이 책임자인 공장장은 징계위 개최 전 가해자를 만나기도 했다.

겨우 열린 징계위에서도 결론은 없었다. 징계위는 경찰 고소 결과를 보겠다며 징계양정을 보류했다. 지회가 한 달 내내 항의를 하고 나서야 5월8일 가해자의 탈의실을 피해자와 분리하는 소극적인 분리조치를 했을 뿐이고, 19일 직장내 괴롭힘을 인정해 감봉 4개월 징계를 내렸다. 발가벗은 채 폭언과 폭력에 시달려 제기한 성희롱 혐의는 인정하지 않았다.

사건 두 달 만에 “탈의실 바꿔라” 미온적 분리

미흡한 분리조치는 강씨에게 당시의 악몽을 계속 상기시키고 있다. 지회에 따르면 강씨와 박씨는 탈의실만 분리돼 있기 때문에 화장실이나 작업장 등을 오가며 마주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김종민 지회장은 “8시간씩 3교대제로 일하는데 휴가 발생 등으로 대체근무도 있어서 겹치는 시간이 없을 수 없다”며 “밥 먹다가도 겹친다”고 설명했다.

지회는 3월30일부터 5월 말까지 7차례나 가해자 분리조치를 요청했지만 사용자가 응하지 않은 점과 성희롱 혐의를 불인정한 점을 두고 고용노동부 서산출장소에 사건을 접수했다. 서산출장소는 13일부터 15일까지 심의위원회를 열고 사정을 듣고 있다.

사법처리도 진행 중이다. 강씨가 3월17일 서산경찰서에 고소장을 접수한 뒤 검찰은 법원에 박씨를 폭행죄와 모욕죄 혐의로 약식명령을 청구한 상태다. <매일노동뉴스>는 KCI 사용자쪽 입장을 물었으나 답변을 듣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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