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범진 변호사(금속노조 법률원)

“짐이 곧 국가다.”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가 이렇게 말한 것이 17세기라고들 한다. 오늘날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사회에서도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정치인이나 세력이 있을까? 불행히도, 오늘날 역시 말로는 몰라도 실천으로 저 말을 신조로 삼고 있는 정치세력은 숱해 보인다. 그리고 한국 사회가 지난 2~3주 동안 새삼 확인한 것 역시 바로 공공의 안녕을 집권세력 자신의 안녕으로 이해하는, 그런 통치자의 존재였다.

5월24일, 그동안 ‘용와대’ 앞 집회는 일단 경찰에게 금지하고 보도록 했던 윤석열 정부가 더욱 노골적으로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정치적 의사표현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자부하는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법무부 장관과 여당 원내대표가 기자회견을 열어 집회를 사실상 '허가제'로 운영하겠다고 선언했다. 건설노조같이 불법전력이 있는 단체는 “공공 안전질서에 직접적으로 위협을 끼칠 것이 우려”되므로 앞으로 신고 단계에서부터 제한을 가하겠다고 한 것이다. 그들이 문제 삼은 사례는 건설노조가 며칠 전 서울 도심에서 진행한, 노숙농성에 연이은 집회였다. 돗자리가 쇠파이프나 화염병쯤이라도 된다는 것인가, 아니면 SF영화에서처럼 이 나라 정부는 건설노조가 미래에 할 불법 행위를 예언할 능력이라도 있다는 말인가?

바로 다음 날인 5월25일에는 대법원 앞에서 비정규 노동자들이 여는 소규모 야간 문화제가 ‘불법 집회’로 규정됐다. 같으달 31일 민주노총의 총파업 집회 날에는 경찰청장이 기동복까지 갖춰 입고 출근해 시위대가 문제를 저지르면 캡사이신을 발사하겠다고 위협했다. 같은 날, 포스코 광양제철소 앞에서는 고공농성을 하던 한국노총 소속 김만재 금속노련 위원장이 경찰 5~6명에게 폭행당한 뒤 뒷목이 눌려 수갑이 채워진 채 끌려나가는 사건도 벌어졌다.

지난 주말인 9일, 대법원 앞에서 다시 열린 비정규 노동자들의 문화제 역시 또 다시 강제해산 됐다. 인도 위에 간이 플라스틱 의자를 두고 앉아 자신들의 얘기를 주고받던 노동자들은, 경찰에 팔다리가 들려 끌려 나가야 했다. 자신들의 사건 판결을 빨리 내려 달라고 법원 앞에 모인 200명도 안 되는 사람들이 대체 누구의 ‘안녕질서’를 어떻게 위협한다는 것일까? 법을 다루는 경찰이 법원 판결이나 헌법재판소 결정 내용을 모른다거나, 법전을 읽지 못할 리도 없을 것이다. 집회 강제해산은 타인의 법익이나 공공의 안녕질서에 직접적인 위험이 명백하게 초래해야 할 수 있고, 법원 앞 집회는 법관의 독립성을 위협하거나 대규모로 확산될 가능성이 없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헌법은 집회에 대한 사전 허가제를 분명히 금지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검찰 출신 한동훈 법무부 장관과 윤석열 대통령의 ‘법치’의 우선순위는 법률과 판결의 문구보다 자신들의 안녕과 이를 보장할 ‘사회 질서’에 있다. 어차피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 백남기 농민을 살해한 경찰의 최루액 물대포 발사에 대해, (경찰청장도 아닌) 서울지방경찰청장에게 겨우 벌금 1천만원의 유죄가 확정된 것도 사고가 일어난 지 8년이나 지난 뒤였다. 잘못된 공권력을 심판하는 길은 멀고 험하지만, 공권력 사용의 효과는 즉각적이다. 그러니 이들은 수치도 염치도 모른 채, 그저 휘두르는 주먹을 포장하기 위해 법치라는 단어를 떠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의 가장 큰 착각은 ‘불법’ 세력, 즉 노조와 시민·사회단체들만 어떻게든 억누르면 자신들의 권력과 안녕이 보장될 것이라는 계산 그 자체에 있다. 정부가 갈라치기를 위해 애지중지하던 ‘MZ(노조)’는 주 69시간 노동의 합리성을 강조하는 그들의 뻔뻔함에 떠나갔다. 최근 대중의 시선은 일본 정부 이상으로 후쿠시마 오염수의 안전성을 열렬히 강조하는 우리 정부의 몰염치에 더더욱, 나날이 차가워지고 있다. 핸드폰 알람을 아무리 꺼 봐야, 아침 해는 밝아 오는 법이다. 그러니 ‘법치’라는 지루하고 식상한 거짓말의 시간도 결국 끝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반드시 그렇게 되도록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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