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서초구 양재동 서울행정법원 청사 전경. <자료사진 홍준표 기자>

법원이 산재 행정소송에서 당사자에게 ‘조정’을 권고했다가 원고 패소로 판결한 사건이 뒤늦게 알려졌다. 통상 법원이 처분 취소를 권고해 행정청(근로복지공단)이 동의하지 않더라도 판단이 뒤집히는 경우는 드물어 극히 ‘이례적인’ 판결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사실상 판단이 내려진 상태에서 조정권고를 재판부가 뒤집었다는 지적이다.

반도체 하청노동자, 주·야간 근무에 심근경색

12일 <매일노동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서울행정법원 행정13부(재판장 박정대 부장판사)는 SK하이닉스 하청업체에서 일하다 숨진 A씨 아내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유족급여 및 장의비 부지급처분취소 소송에서 지난달 11일 원고 패소로 판결했다. 재판부는 지난해 11월 조정을 권고했다가 5개월 뒤 원고 패소로 판결했다.

소송은 반도체 공정에서 근무하던 A씨가 2020년 9월23일 자정 무렵에 하청업체 사무실에서 쓰러진 채 발견돼 급성 심근경색으로 숨지면서 시작됐다. A씨 아내는 업무상 재해에 해당한다며 공단에 유족급여와 장의비 지급을 청구했지만 인정되지 않자 2021년 12월 소송을 냈다. 유족측은 A씨가 사망 전 6일간 연속 야간근무를 하는 등 단기과로에 노출됐고 장기간 주·야간 교대근무로 업무부담이 가중됐다고 주장했다.

재판부는 지난해 5월 첫 변론기일을 진행한 뒤 곧바로 조정을 권고했다. 그해 11월 재판부는 “사건의 신속·원만한 해결을 위해 조정을 권고한다”고 쌍방에 알렸다. 조정권고안에는 “2021년 9월14일 원고에게 내린 유족급여 및 장의비 부지급 처분을 취소하고, 원고에게 신청취지에 따른 처분을 한다”는 내용이 적혔다. 또 공단이 처분을 취소하면 유족은 곧바로 사건 소를 취하하라고 권고했다.

공단 조정권고 부동의에 재판부 “기저질환 영향”

행정소송에서 ‘조정권고’는 법원이 행정처분을 내린 행정처에 처분을 변경하거나 취소할 것을 권고하고, 소송을 제기한 당사자에게는 소를 취하하도록 권고하는 제도다. 다만 행정소송법에 명문의 규정은 없다. 민사소송법과 법원조직법 등을 준용한다. 하지만 재판부 권고안을 당사자가 수용해 행정청이 처분을 변경하면 통상 당사자는 소를 취하하는 것이 관례로 굳어져 왔다.

A씨 사건에서도 유족측은 조정권고 20여일 뒤 재판부에 동의서를 제출했다. 그런데 공단측이 조정권고안에 대해 부동의하자 재판부는 지난해 3월 한 차례 변론기일을 진행한 뒤 곧바로 선고기일을 잡았다. 이후 지난 5월11일 원고 패소로 판결했다. 재판부는 “망인의 업무와 상병의 발병 또는 악화 사이의 상당인과관계가 충분히 증명됐다고 볼 수 없다”며 유족 청구를 기각했다.

A씨가 고혈압·부정맥 등 기저질환을 앓았는데도 10년 이상 흡연하는 등 건강관리에 소홀했다는 이유를 들었다. 돌발 과로나 교대근무의 업무부담 가중요인 등의 영향이 있다고 볼 수 없다고도 했다. 심장혈관내과 감정의가 교대·야간근무가 급성심근경색 발병에 미친 영향을 평가하기 어렵다고 밝힌 소견이 판단에 작용했다.

산재 변호사 “이례적 판결” 유족측 항소

문제는 ‘원처분 취소’ 취지의 조정권고를 재판부가 뒤엎었다는 점이다. 조정권고는 분쟁을 신속하게 해결하기 위해 내려지고, 공단이 거부하더라도 대개 재판부가 판단을 뒤집는 사례는 없다고 산재 전문 변호사들은 입을 모은다. 산재 로펌의 변호사 A씨는 “조정권고 이후 원고 패소 판결은 극히 드물다”며 “재판부가 원고 승소할 정도의 증명이 충분히 되지 않았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다른 산재 전문 로펌의 변호사 B씨도 “조정권고를 공단이 불수용했을 때 원고 패소 판결이 난 사례는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유족측은 지난달 26일 항소한 상태다. A씨 아내를 대리하는 김찬영 변호사(법무법인 사람앤스마트 서울분사무소 대표)는 “재판부가 조정권고를 후 공단이 부동의해 재판이 다시 진행되더라도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재판부의 판단이 바뀔 가능성은 희박하다”며 “그러나 공단이 부동의 후 증거 신청과 추가 반박을 전혀 하지 않았는데도 재판부는 조정권고에 이어 원고 패소 판결을 선고했다. 매우 유감스러운 결과”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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