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민 충청남도노동권익센터 정책기획팀장

류민 충청남도노동권익센터 정책기획팀장

편집부 webmaster@labortoday.co.kr

3년 8개월. 노동권익센터에서 일하며 지낸 시간이 어느덧 4년에 가까워졌다. 일의 의미, 생의 효능감에 대한 질문과 대답은 해를 넘길수록 어지럽고 어렵다. 그래도 어느 때에는 신이 나고 살아 있다는 것을 선연하게 감각하는 순간들을 만난다. 대체로 거리에서, 일과 삶의 어느 현장에서, 사람들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 다른 호흡이 잠시 교차하는 순간들 사이에서 존재의 의미를 간신히 긍정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현장 캠페인은 즐겁다. 사무실, 모니터, 연구자료나 통계 숫자 너머, 일하는 사람들 저마다의 고유한 세계를 잠시라도 마주하는 순간들로부터 깊이 배운다. 지역 곳곳에서, 일의 세계 곳곳에서, 더 다양한 일과 삶의 현장에서, 노동권익센터가 지역의 노동자들과 더 가깝게 마주하고 일과 삶의 존엄에 관한 여러 의제들을 함께 고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지난 5월17일에도 거리에서 노동자들을 만났다. 1990년 5월17일, 세계보건기구(WHO)는 국제질병분류(ICD, International Classification of Diseases)를 개정하면서, ‘동성애’를 정신장애 목록에서 삭제하고, 성적 지향의 다름이 질병이나 장애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 이후 이날 5월17일을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IDAHOBIT, International Day Against Homophobia, Biphobia, Interphobia & Transphobia)로 기념하며, 매년 전 세계 곳곳에서 성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혐오와 차별에 저항하는 여러 실천이 이어지고 있다.

17일을 앞두고 센터 정책기획팀 동료들과 이런저런 고민들을 나누었다. 여러 과업에 쫓겨 커다란 규모의 캠페인을 준비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한 상황이었지만, 지역에 존재하는 성소수자 노동자들에게 힘이 될 수 있는 캠페인을 작게라도 꼭 진행하면 좋겠다는 고민이었다. 지난날에는 연대와 지지의 인사를 담은 메시지 카드 정도를 온라인으로 발행하고 지나왔는데, 올해에는 거리에서도 'IDAHOBIT'의 의미를 나누고, 지역 성소수자들이 일의 세계에서 겪는 문제들을 함께 고민할 수 있는 노동상담과 심리상담 채널을 안내하는 현장 캠페인을 함께 진행했다.

그런데 캠페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전에 없던 걱정이 들었다. 노동권익센터가 성소수자 의제를 발화하고 실천하는 과정에서 소위 ‘정무적’ 고려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다. 순간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노동정책 전반이 후퇴하고, 지방자치단체 재정으로 운영하는 민간위탁 지역 노동센터들 다수의 존립이 위태로운 정치 지형에 대한 불안이 엄습했다. 지역 의회에서 착수한 민간위탁기관 대상 특별 조사나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지렛대 삼는 지역 인권조례 폐지 흐름 등을 떠올리면서, 성소수자 의제에 대한 발화와 실천이 노동권익센터를 비롯한 지역 노동센터(운동)의 존립을 위협하는 정치적 공격의 빌미를 제공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사념을 마주한 것이다. 마주한 불안과 사념이 크게 놀랍고 깊이 부끄러웠다.

노동권익센터는 ‘노동자가 존엄한 오늘, 차별없이 평등한 내:일’을 비전으로, ‘다양성과 평등’을 실천의 기준이 되는 핵심가치 중 하나로 삼고, 차이가 차별이 되지 않는 세계, 노동과 삶의 관계에서 모든 이들이 평등한 사회를 위한 실천들을 다짐하며 출발했다.

일하는 ‘모두’, 일을 멈춘 모두의 ‘존엄’을 향한 실천을 주장하면서, 일의 세계에서 성소수자가 마주하는 숱한 존엄의 훼손에 대해 함께 톺아보고, 나누고, 저항하고, 답을 찾지 않는다면, 센터는 존재의 이유와 책임을 모두 저버리는 위선을 거듭하는 일이리라.

두려워하며 물을 것은 노동권익센터가 얼마나 오래 존립할 수 있는 것인가가 아니라, 단 하루를 존재하더라도 센터의 존재 이유와 책임을 배반하고 있지는 않은가 일 것이다.

두려워하며 물을 것은 혐오 세력의 공격을 어떻게 피할 것인가가 아니라, 그들의 저열한 위협에 맞서 어떻게 노동자 모두의 존엄을 지킬 수 있는 연대를 조직할 것인가를 다시 마음에 새긴다.

지난 17일 캠페인에서 피켓을 몸에 메고 거리에 선 우리에게 화물연대 슬로건이 붙어있는 대형차의 운전자가 고개를 숙여 인사를 전해 왔다. 또 다른 거리에서는 쓰레기 수거 차량에 몸을 싣고 이동하던 환경미화 노동자들이 캠페인 중인 동료에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줬다고 한다. 다정한 연대의 인사들이 마음에 박힌다. 잠시나마 가졌던 어떤 자기검열의 시간이 죄스럽고 부끄러웠다. 부끄럽고 부끄럽지만, 잊지 않기 위해 적어두고 나눈다.

충청남도노동권익센터 정책기획팀장 (recherche@cnnodong.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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