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윤수 스포츠평론가

나는, 아직도 익숙하지 않고 때로는 놀라기도 한다. 무슨 얘기인가 하면, 전철을 타거나 이마트 같은 큰 쇼핑몰의 계산대에 서 있거나 거리의 흔하디 흔한 카페에서 외국인을 마주쳤을 때, 아직도 나는 놀란다.

왜 그럴까. 급히 생각해 보면 두 가지 이유가 있다. 그 하나는, 법무부 통계로 2022년 말 기준 장·단기 체류 외국인이 224만5천912명인데, 어쩌면 그 많은 체류 외국인들을 일상에서 자주 접하지 못한 까닭이 있다. 다른 이유는, 아마도 내 안의 어딘가에서 발동한 것으로 짐작되는데 ‘한국인’이 아닌 사람들을 보면 여전히 ‘놀라도록’ 프로그래밍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숨가쁘게 돌아가는 글로벌 경제 환경과 국경을 넘나드는 노동시장과 학업시장으로 인해 이 한반도는 지난 20세기의 고립된 지정학적 위치가 아니라 수많은 인종이 수많은 이유로 수많은 지점에서 만나고 교차하는 공간이 됐음에 나는, 또 어쩌면 우리는 ‘한국인’이 아닌 사람을 보면 아직까지도 ‘놀라도록’ 감각이 고정돼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다.

‘너네 나라로 돌아가라’?
낡고 닳은 20세기 국수주의적 감정

법무부 통계로 2022년 말 기준 취업자격 체류외국인은 44만9천402명이다. 이른바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의 수는, 집계 기준에 따라 다르지만 대략 40만명을 헤아린다. 또 하나의 수치를 보면, 여성가족부와 교육부의 2021년 통계에 따르면 초·중·고교에 다니는 다문화가정 자녀는 16만58명이다. 이는 2012년의 4만6천954명보다 240% 증가한 것이다. 같은 기간 전체 학생수는 672만명에서 532만명으로 140만명(21%)가량 줄고 있는데, 다문화가정 자녀는 240% 증가했다. 이 추세는 앞으로 더욱 가파르게 전개될 것이다.

현실이 이러함에도 나는, 또는 우리는 아직도 놀라야 하는 지난날의 감각을 갖고 있는 것이다. 더러 필요할 때는 우리의 ‘선택과 결정’에 의해 ‘내부화’하고 그 결정에 부합하는 성취가 이뤄졌을 경우 ‘코리안 드림’을 이뤘다고 하면서도 그 반대 경우가 되면 ‘먹튀’라거나 ‘애국심이 없다’는 식으로 비난한다.

일상의 경제와 노동 공간에서는 그런 일이 드물지만 이를테면 스포츠에서, 특정 종목의 메달 획득을 위해 ‘귀화’ 또는 ‘특별 귀화’를 추진하거나 그것이 성사된 이후에 어김없이 나타나는 현상이다. 미국 버지니아주 빈민가 출신으로 힘겹고 거친 성장 과정을 거쳤으나 농구를 통해 자신과 가족의 미래를 발견한, 그리하여 미국은 물론 필리핀 리그 등에서 주목할 만한 활약을 펼친 후 한국 프로리그에서 두드러진 성취를 보였고 그 결과 귀화를 통해 ‘한국인이 된’ 라건아 선수는 종종 경기장이나 인터넷상에서 ‘너네 나라로 돌아가라’는 혐오와 차별을 겪었으니, 도대체 어디로 돌아가란 말인가.

라건아 선수를 비롯한 스포츠계의 귀화 또는 특별 귀화 선수들은 그나마 ‘우리의 필요’라는 전제라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선수들, 아 그리고 무엇보다 피부색의 단순한 차이 말고는 법적으로나 그 무엇으로도 아무런 차이가 없이 한국에 정착했거나 한국에서 태어나 성장한 사람들이 교육이나 노동에서 의미 있는 비중으로 늘어나는 상황에서 여전히 우리는, 아니 적어도 나는 낡고 닳은 20세기의 국수주의적 감정을 근원적으로 버리지 못한 채 아직도 놀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스포츠뿐이랴, 세상은 변하고 있다

사실 20세기 한국 사회의 강력한 ‘동질성 문화’는 오늘날 여러 분야에서 이미 흔들리고 있다. 물론 그것은 인권 의식의 개선이나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이는 인식 개선의 측면도 있지만, 냉정하게 보면 현실 기반 자체가 흔들렸기 때문에 그 기반 위에서 실존하는 인간이라면 그 기반에서 살아가기 위한 제도나 가치를 승인할 수밖에 없는 측면이 크다. 자국인 노동자 수급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해 외국인 노동자를 고용하게 되면, 일부 악덕업주를 제외하고는 외국인 노동자 고용에 따른 법과 제도를 최소한이나마 준수해야 하고 그렇게 일상을 함께하다 보면 인간적 친밀감과 유대감도 형성되는 것이다. 요컨대 세계사적인 유동성의 급증과 한국 사회의 구조적 필요에 따른 다양한 인구 구성은 기존의 제도와 인식을 변화시키게 된다.

한 세대 이상의 장기적인 측면에서는 그렇게 변화하지만, 그 변화의 단기적이며 일상적인 국면에 놓여 있는 개인으로서는 필연적인 변화를 제때 감지하지 못하고, 일상의 어떤 계기에서 순간 놀라고 마는 것이다. 전철이나 이마트에서 이른바 ‘외국인’을 마주쳤을 때 말이다. 외국인이든 아니든 무방하지만, 어쩌면 그 사람은 ‘외국인’이 아닐 수도 있는데 말이다.

왜 이런 얘기를 하느냐 하면, 지금 스포츠계의 중요한 화두이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어떤 국면에서는 제도의 준수와 가치의 공유가 뒤따를 수밖에 없다. 이른바 ‘한국인’이 ‘순수’한 것은 말도 안 되는 얘기고 학문적으로도 ‘단일 인종’인가에 대해서는 최근 한 세대 이내에 인류학·고고학·민속학·언어학 등에서 다른 의견이 이미 제출돼 있다. 앞서 말했듯이, 사회 전체적으로 볼 때 우리의 필요와 사회적 원인에 의해 외국인(특히 노동자)이 급증했음에도 그 복지·인권·임금·신분 등에 여전히 제약이 많은 것처럼, 스포츠의 경우 타인종이나 이주민은 최고 수준의 국가대표는 물론이고 이른바 직업상 ‘전문 체육선수’로 활동하는 것도 쉽지 않다. 이는 체육계가 ‘타인종·타문화’에 배타적인 면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체육계’가 자신들의 울타리를 아주 강하게 쳐 놓고 어지간하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폐쇄적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타인종·다문화뿐만 아니라 ‘비선수 출신’을 배제하고 그다음에 ‘비엘리트 출신’마저 배제하는 견고한 폐쇄적 문화가 강고하다.

뒤떨어진 체육계의 폐쇄적 문화

그러는 한편, 인구 감소 및 체육인 지망생 급감 때문에 이른바 이주노동자나 ‘다문화 가정’이 자녀들에게 체육을 권유하는 현실도 전개되고 있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국가대표 선발이나 프로선수 진출이 법적이나 인식 측면에서 용이한 현실은 아니다. ‘우리’의 필요에 의해 권유를 하면서도 ‘우리’의 낡은 제도와 인식으로 보이지 않는 장벽은 계속 유지하는 현실이다.

이는 곧 거대한 인구 변동과 노동시장 및 도시 문화의 급변에 의해 크게 흔들릴 것이다. 인권 의식이나 스포츠 정신에 의한 변화도 있겠지만 유럽 여러 나라들이 그랬던 것처럼 다인종·다문화 시대는 중력의 법칙처럼 이미 압도적으로 다가온 현실이기 때문이다.

스포츠는, 사회의 여타 분야와 이슈가 그렇듯이 각 시대마다 사회적 요인과 욕망과 요구와 변화에 의해 그 가치가 구성·재구성된다. 20세기에는 금메달·국위선양이었으나 21세기 들어와서는 문화와 인권과 생활이 탑재되기 시작했고 이제는 다양성과 연대, 존중과 대화, 교섭과 융합이 전개될 것이다. 이는 한 개인이나 체육계의 선택이나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이를 준비하지 않으면 체육계 자체가 고립되고 사회 전체가 동요하게 된다. 유럽축구연맹의 ‘리스펙트’ 운동이나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올림픽 2020어젠다 캠페인이 바로 그 증거다. 그 미래, 아니 이미 다가온 현재를, 과거의 인식에 머물러 있는 체육계가 계속 ‘놀라면서’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된다.

스포츠평론가 (pragu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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