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진미 영화평론가

<불멸의 여자>는 연극계에서 화제를 모은 동명의 작품을 스크린으로 옮긴 실험적 형태의 영화다. 감정노동자들이 겪는 극한의 감정을 관객들에게 고스란히 체험시키는 작품으로, 외국에서 먼저 주목했다. 2022년 웨일즈 국제영화제(WIFF) 베스트극영화상을 수상했고, 라스베이거스 독립영화제와 바르셀로나 독립영화제에서도 수상했다. 해외 호평에 힘입어 지난달 5일 국내에서 개봉했다.

원작자 최원석이 희곡을 쓰고 연출을 맡은 연극 <불멸의 여자>는 2013년 34회 서울연극제 공식 개막작으로 처음 무대에 올랐다. 쇼핑몰의 화장품매장을 배경으로, 항상 웃으며 고객을 맞아야 하는 판매원이 겪는 감정노동과 직장내 성희롱을 극적인 긴장감에 실어 고발하는 잔혹극이다. 이후 꾸준히 무대에 올랐고, 2018년 5회 서울연극인대상 대상과 연출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코로나 시국을 거치면서 연극계는 큰 침체를 겪었는데, 원작자 최원석과 친분이 있던 최종태 감독이 연극을 영화로 옮기겠다고 결심해 영화 <불멸의 여자>가 만들어졌다. 연극에 출연했던 배우들이 거의 그대로 출연하고, 안내상 배우만 추가로 합류했다. 부천의 한 극장을 7일간 빌려서 단 6일 만에 촬영을 마친 놀라운 독립영화다.

1. 스테이지 시네마

영화가 시작되면 카메라는 객석을 비춘다. 이곳이 극장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어서 영사기가 탁 켜지면서 영사기 불빛이 무대 위에 떨어진다. 그 무대 위로 주연배우가 나와 아무도 없는 객석을 향해 인사를 한다. 이제부터 스크린에 펼쳐질 내용이 연극 무대의 장면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무대 위에는 매장을 꾸민 듯한 단출한 세트가 놓여 있고, 연극 무대를 나타내는 붉은 커튼이 계속 보인다. 하지만 영화는 단지 연극 무대를 카메라로 찍어서 보여주는 밋밋한 형태를 취하지 않는다. 독일 표현주의 영화가 연상되는 극단적인 음영을 조명으로 사용하고, 배우의 얼굴을 정면으로 비추는 클로즈업을 비해 다양한 앵글의 카메라 워크를 활용해 연극에서는 볼 수 없는 극강의 몰입감을 안긴다. 여기에 다소 거슬리는 음악과 삐걱거리는 마룻바닥 음향 등을 사용해 긴장감을 극대화한다. 요컨대 극의 구성, 무대의 세트, 배우들의 동선 등은 연극 무대의 것을 최대한 살리지만 조명, 카메라 워크, 음향 등을 통해 몰입감을 끌어올려 객석 1열에 앉아 연극을 관람하는 것보다 더 집중된 ‘하이퍼 리얼’의 상태를 제공한다.

영화는 빽빽한 무대의 긴장감을 담고 있으면서, 이와 대비되는 해변 장면을 간간이 삽입한다. 매장에서 감정노동을 위해 입꼬리에 힘을 주고 웃는 희경(이음)의 얼굴에 대비돼 바람결에 자연스레 웃음 짓는 희경의 표정에는 해방감이 느껴진다. 연극과 영화 두 장르의 장점을 절묘하게 결합한 제3의 복합장르라 할 수 있다.

2. “사랑합니다, 고객님”

단정한 매무새로 항상 웃으며 고객을 맞는 희경은 ‘불멸의 미소 천사’로 불리는 모범 사원이다. 종일 서서 일하는 통에 종아리엔 하지정맥류가 흉터처럼 박혀 있고 진료받을 짬도 없지만, 오늘도 정돈된 어투로 손님을 맞는다. 후배 승아는 다혈질의 감정을 제어하지 못할 때도 있지만, 전라도 사투리를 완벽하게 교정한 어투로 깍듯하게 손님을 응대한다. 이들에게 한 불만 고객의 전화가 걸려온다. 이때만 해도 사태가 최악으로 펼쳐질 줄은 몰랐다. 실제로 모든 진상 고객의 ‘대환장쇼’가 그러하다. 시작은 미미했으나 끝은 창대해진다. 사과하고 수습하려는 희경과 승아의 말꼬리를 진상 고객은 끊임없이 낚아채 빈정거린다. 이 사람은 뭘 원하는 걸까. 혹시 서비스 노동자의 응대를 시험하려는 ‘암행어사’(미스터리 쇼퍼)인가. 이런 의심은 사태를 더욱 꼬이게 만든다.

진상 고객이 막무가내로 시비를 붙는 와중에 희경과 승아를 보호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CCTV는 서비스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용도가 아니다. 오히려 감시하기 위한 용도다. 이를 진상 고객도 잘 알고 있다. 경찰을 부르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경찰 출동은 영업에 방해가 되며, 결국 계약직인 노동자에겐 불이익이 돌아올 것이다. 지점장으로 대표되는 경영진들은 어떨까. 영화는 극 초반에 암시된 직장내 성희롱을 넘어 매우 불평등한 성착취 관계까지 보여준다. 영화는 직장내 성착취를 감정노동자의 소외와 굴욕을 극한으로 표현하는 방편이자, 비밀과 반전을 지렛대 삼아 극적인 긴장감을 끌어올리는 장치로 활용한다. 서비스 노동자의 감정노동을 다루는 텍스트에서 지점장과 부하직원의 성착취 관계를 이런 식으로 다루는 것이 적절한지는 의문이다. 다만 감정노동이 주로 여성의 감정을 착취하는 성별화된 노동이며, 때로는 섹슈얼리티를 포함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껄끄럽지만 시사점을 던지는 연결이다.

3. 산업안전보건법 41조

‘감정노동’은 직업상 본래의 감정을 숨긴 채 상대방이 원하는 감정을 표현하는 노동을 뜻한다. 미국의 사회학자 앨리 러셀 혹실드의 1983년 저서 에서 처음 소개한 개념으로, 책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관리된 감정은 상품이 된다는 분석이 담겨 있다. 한국에서는 2009년에야 번역판이 <감정노동>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됐다. 그만큼 개념 정립이 늦었다. 하지만 2010년대에 피해사례가 언론에 집중 보도되면서 사회적인 논의가 이뤄졌다. 연극 <불멸의 여자>가 나온 것도 그 일환이다.

판매원, 승무원, 외식업 종사자, 미용사, 간호사, 콜센터 직원 등 감정노동자들은 실제로 느끼는 감정과 외부로 표현하는 감정이 서로 달라 충돌하면서 괴리감을 느낀다. 이로 인해 스트레스와 우울증, 심하면 대인기피증까지 일으킨다. 영화에는 “감정노동 수당으로 월 5만원이 책정됐다”는 대사가 나올 뿐, 감정노동자를 보호하려는 조치는 없다. 오히려 웃지 않는다는 이유로 해고된 감정노동자의 원한이 진상 고객을 만들어내는 악무한이 그려질 뿐이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감정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이 시행 중이다. 2018년에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으로 감정노동자에 대한 사업주의 조치의무가 신설됐다. 이후 몇 번의 개정을 거처 현행 산업안전보건법 41조에는 “사업주는 (중략) 고객응대근로자에 대해 고객의 폭언, 폭행, 그 밖의 적정범위를 벗어난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유발하는 행위로 인한 건강장해를 예방하기 위해 고용노동부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필요한 조치를 해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ARS 대기 중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라는 안내음성이 흘러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연극이 영화로 만들어지는 십 년 사이, 감정노동자 보호법이 만들어지고, 각 사업장마다 매뉴얼 등이 마련된 건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나 가장 끔찍한 것은 변하지 않았다. 그것은 안간힘을 쓰며 웃는 낯이 성적으로까지 모욕당하고, 을과 을이 물어뜯는 무간지옥이 반복되는 것이다. “사랑합니다, 고객님”이라는 인사말이 어느 순간 “사람입니다, 고객님”처럼 들린다. 고마해라. 사람이다.

영화평론가 (chingme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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