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호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오늘날 대중은 사회 문제에 날카롭게 반응하는데 정치인은 점점 둔감해진다. 지금 대중은 과거 권위주의 시절 대중이 아니다. 자신은 피해자라던 가수 임창정의 동영상이 나오자마자 세븐일레븐은 그와 함께 기획한 ‘소주한잔’이란 증류식 소주 판매를 중단했다. ‘소주한잔’은 임창정씨가 원재료 선정부터 병 디자인까지 제품 개발 전 과정과 홍보에 직접 참여했다. 이미 지난 2월부터 시중에 판매돼 꽤 인기를 끌었는데, 세븐일레븐은 상당한 매몰비용을 감수하고서도 판매 중단을 선언했다.

세븐일레븐이 발빠르게 임씨를 손절한 이유는 주가조작 논란이 그에게 옮겨 붙어 여론이 악화해서다. 이렇게 기업은 점점 예민해지는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려고 상당한 손해까지 감수한다.

그러나 정치는 오히려 후퇴한다. 대통령이 한전을 향해 짜증 섞인 한마디를 내뱉자 한전은 지난 12일 임금을 동결하고 한전공대 출연금을 줄이는 등의 자구책을 내놨다. 하지만 이게 한전만 탓할 일이 아니라는 건 국민 모두가 다 안다. 이명박 정부 때부터 자원외교니 뭐니 해서 무리하게 투자했고 유가가 급등해 원가가 올랐는데도 선거만 의식한 두 집권 정당이 번갈아 가며 전기요금을 제대로 인상하지 않은 이유까지 겹쳐 이런 사단이 났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짜증만 낸다. 진짜 짜증은 국민들 몫이다. 하물며 정치인 김남국 같은 사람은 말해 무엇하랴.

고용단절 여성을 노동시장으로 끌어들인답시고 최저임금의 절반에 그치는 월 100만원 받는 가사도우미를 외국에서 잔뜩 들여오자는 목소리가 정치권 주변에서 아우성친다.

전직 경제부총리 등 경제 원로라는 사람 31명이 지난 22일 박정희가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수립 60주년은 기념해 열리는 행사를 앞둔 인터뷰에서 “가족 단위 이민을 대폭 늘려라”고 주문했다.(매일경제 5월23일 12면) 지금처럼 가족을 고국에 두고 단신으로 왔다가 돌아가는 이주노동 대신 가족 단위로 입국하도록 정책 기조를 바꾸자는 점에선 진일보하지만 실상을 잘 모르는 탁상행정일 뿐이다. 이주노동을 논하려면 지금 있는 고용허가제부터 손질하는 게 먼저다.

일손이 부족한 우리 농촌에 계절노동자로 5개월쯤 입국하는 네팔 노동자는 한국에 도착하기도 전에 1천만원이 훨씬 넘는 빚을 지고 출발한다. 이름만 컨설턴트로 고상하게 바꿨을 뿐 과거 취업사기꾼 짓을 그대로 하는 브로커에게 900만원을 송출비용으로 주고 한국행 항공권과 건강검진 비용까지 별도로 내야 한다. 이렇게 입국해 5개월 동안 일해 받은 돈으로 빚도 못 갚을 지경이다. 국가인권위원회와 아시아이주자포럼 등이 지난 19일 인권위에서 연 ‘계절 이주노동자 해외조사결과 발표 및 제도개선 방안 모색 토론회’에서 이런 처참한 이주노동 현실이 드러났다. 그런데도 전문가라는 사람들은 ‘가족 단위 이민을 대폭 늘리라’는 한가한 소리나 하고 앉았다.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소위원회가 지난 22일 두 거대정당의 합의로 전세사기 특별법을 통과시켰다. 여러 언론이 ‘최우선 변제금을 10년 무이자로 대출해 준다’는 쪽에 방점을 찍어 보도했지만, 실상은 ‘빚에 빚을 더하는 정책’일 뿐이다. 심지어 떼인 보증금을 돌려받을 길이 아예 사라졌다. 아마도 두 거대정당은 이 정도면 불타는 여론이 조금은 가라앉을 거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이를 제대로 보도한 신문은 경향신문 정도에 그쳤다. 정치인과 언론이 세상 돌아가는 꼴을 제일 모른다.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leejh67@hanmail.net)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