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건의료노조가 25일 오전 서울 영등포 노조 생명홀에서 불법의료 근절과 보건의료인력문제 해결을 위한 투쟁계획 발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정기훈 기자>

“나는 수십 년간 의료법을 어기며 일하고 있는 간호사입니다. 병원 현장은 엉망입니다. 직종별 업무 분담이 이뤄지지 않아 임상병리사·간호사·방사선사 누구의 업무인지도 모르고 일을 해야 합니다. 환자에게 피해가 가면 안 되니 닥치는 대로, 시키는 대로 합니다. 의사는 바쁘다, 수가 적다는 이유로 명확한 의사 업무마저 간호사에게 전가합니다. 법을 지키는 방법은 나도 잘 압니다. 어떤 상황이 일어나도, 돌이키지 못할 피해가 환자에게 가더라도 이를 악물고 내 일이 아니라며 버티면 됩니다. 그렇게 할 수 없어서, 환자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널 것을 알면서도 버틸 수 없어서 불법의료를 하는 게 현실입니다.”

상급 종합병원에서 21년간 일한 간호사 ㄱ씨의 말이다. ㄱ씨는 보건의료노조(위원장 나순자)가 25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노조 사무실에서 연 기자회견에 가면을 쓰고 이렇게 말했다. 불법의료 고발을 피하기 위해서다. ㄱ씨는 “법을 지키는 의료현장, 환자가 믿고 치료받는 안전한 의료현장에서 가면을 벗고 당당하게 합법적으로 일하는 날이 오길 바란다”고 말했다.

의료법상 의료인 업무규율 허술, 복지부는 방치

노조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직종별 업무 범위 명확화 △PA(진료보조)간호사 불법의료 근절 △근무조당 간호사 대비 환자 비율 1대 5 등을 요구하고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총파업에 나서겠다고 예고했다.

나순자 위원장은 최근 간호법 제정 논란의 핵심 원인은 허술한 의료법과 보건복지부의 무능이라고 지적했다. 나 위원장은 “1951년 제정한 의사 직역과 의료기관, 급성기 진료를 중심으로 한 의료법 체계로는 간호사와 의사, 간호사와 타 직종 간 업무 범위가 불명확해 지속적 갈등이 양산될 수밖에 없다”며 “의료법상 의료인 업무 범위 규율이 허술한 가운데 복지부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고 방치하면서 모든 문제의 원인을 간호법 때문이라고 핑계 댄다”고 꼬집었다. 간호법 제정 관련 갈등을 간호사와 다른 직종 간의 갈등으로 몰아놓고 발을 뺀 정부가 실제로는 해야 할 일을 내버려 두면서 발생한 문제라는 점을 지적한 셈이다.

노조는 의료 관련 각 직종은 자격제도를 통해 운용하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혼선이 잦다고 설명했다. 나 위원장은 “구체적 규정이 없어 의사와 간호사, 방사선사가 모두 초음파 검사를 하다가 분쟁이 생기면 그제야 정부가 나서 규칙을 정하는 식”이라며 “직종 간 갈등이 증폭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노조는 보건의료인력정책심의위원회 산하에 모든 직종 대표가 참가하는 업무범위조정위원회를 설치해 논의해야 한다며 조규홍 복지부 장관 면담도 요청했다.

불법 내몰린 의료인, 의대 정원 18년째 3천58명

불법의료 문제 해법으로는 의사 인력 확충을 요구했다. 의사 부족으로 의사의 업무가 다른 직종에 전가되는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2006년 3천58명에서 늘지 않는 의대 정원을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 위원장은 “올해 노조 실태조사 결과 의사가 부족하다는 인식은 간호직에서 82.6%에 달했고, 의사 대신 처방과 시술 드레싱을 한다는 응답은 44.9%로 나타났다”며 “무면허 불법의료 행위가 발생하는 이유”라고 지적했다.

노조는 또 간호사대 환자 비율을 1대 5로 제도화하는 방안과 간호간병통합서비스 전면 확대 및 간호사 처우개선도 촉구했다. 그러면서 복지부뿐 아니라 의사협회와 병원협회도 사용자단체로서 책임을 다하라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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