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병길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상임활동가

한국비정규노동센터는 2011년부터 매년 ‘비정규노동 수기 공모전’을 하고 있다. 지난해 12회 차를 맞았다. 지난 1일 수상작·응모작 중 44편을 엮어 <일복 같은 소리>(도서출판 동녘)라는 책을 펴냈다. 19일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비정규노동 수기 공모전은 단순히 글쓰기 실력을 뽐내는 자리가 아니다. 비정규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과 삶을 얼마나 진솔하게 풀어냈는지, 힘든 현실을 개인적 차원에 머물지 않고 사회적으로 성찰했는지, 변화를 위해 어떤 몸짓을 담았는지를 중점적으로 본다.

출판기념회 특강 강연자로 나온 이시백 소설가(수기 공모전 심사위원이기도 하다)는 ‘저항의 글쓰기’를 강조했다. 억압과 부조리를 마주했을 때, 단순히 아파하거나 분노하는 등 개인적 차원의 반응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노동자가 고통받을 수밖에 없는 현실 이면을 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에 붙들려 있어서는 곤란하다. 나와 함께 노동하는,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 나의 이야기를 넘어서 우리의 이야기가 필요하다.

<일복 같은 소리>는 44편의 수기를 해당 노동자가 아닌 노동이 이루어진 공간으로 분류했다. 예를 들어 학교 교무행정사는 ‘교무실’, 방송 작가는 ‘방송국’, 항공기 객실 청소 노동자는 ‘비행기’ 이런 식이다. 책의 차례를 보면서 일상의 지도가 머릿속으로 그려졌다. 그것은 추억 속의 공간(교실이나 급식실, 학교 도서관 등), 자주 이용하는 공간(도로, 카페, 편의점, 우체국 등), 무심코 지나칠 법한 공간(공사장, 맨홀, 자동차 대리점 등) 등으로 구성돼 있었다. 왜 노동자가 아니라 노동이 이뤄진 장소에 초점을 맞췄을까. 우리에게 노동자는 ‘익명’으로 남았지만, 그 노동의 장소는 ‘인상’을 남겨서라고 짐작해 본다.

비정규 노동자의 이야기는 귀하다. 전체 임금노동자 중 40%가 넘는 이들이 비정규직이지만 이들의 목소리는 삭제돼 있다. 그 이유는 복합적이다. 매일의 일에 치여, 저임금과 불안정한 고용에 시달리다 보니, 파편화되어서, 노동기본권을 제대로 누리지 못해서….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비정규 노동자의 서사는 찾아보기 힘들다. 주인공이 하는 일은 대체로 정치인, 법조인, 기업인, 언론인, 예술가처럼 사회적으로 선망받는 직업이다. 물론 비정규 노동자도 등장하나, 평면적이며 불행 서사의 ‘구색’ 맞추기용으로 소비되는 경우가 많다.

비정규 노동자는 투명하지 않다. 이리저리 휘둘리기만 하는 대상이 아니다. 기승전결을 가진 삶 속에서 희노애락을 느끼고 때로는 결연히 투쟁하는 주체다. 이들이 쓴 수기를 읽다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일복 같은 이야기> 내용 일부를 간략히 소개해보겠다.

“한 연극배우는 생계가 급해 ‘공사장’에서 일하게 된다. 출근 첫날, 어머니에게 사실대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위험한 일이라 괜히 걱정을 끼칠까 봐서다. 처음 해본 건설 노동은 상당히 고되다.”

“‘인공지능 개발사’에 취업한 한 기간제 노동자는 통화 내용을 타이핑하는 일을 한다. 그런데 지나치게 사적인 통화를 들으며 죄책감을 느낀다. 이는 자신의 노동을 성찰해 보는 계기가 된다.”

“‘비행기’에서 일하는 한 청소 노동자는 회사에 노동조합이 생기자 기쁜 마음으로 가입한다. 부당하게 뺏긴 임금을 받아내고, 공휴일에 당당히 쉬고, 위험한 노동환경을 개선하는 등 성과를 낸다. 그러나 회사 탄압이 악랄해지고, 코로나19 시기 무기한 무급휴직에 반대하다 부당해고를 당한다. 이어서 힘겨운 투쟁을 시작한다.”

비정규 노동자의 살아 숨 쉬는 이야기가 더 널리 퍼졌으면 좋겠다. 그들의 이야기는 새로운 운동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고용형태, 일의 방식, 노동하는 시간과 공간 등이 갈수록 더 다변화·파편화되는 현실이다. 나와 같은 일을 하는 이가 어떻게 노동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알기 어렵다. 비정규 노동자끼리 공통의 기억과 공유 감각을 가지기 힘든 것이다. 그런데 이야기는 비정규 노동자 사이에 놓인 장벽을 넘나드는 힘이 있다.

비정규 노동자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비정규 노조의 이야기도 필요하다. 기존 노조의 운동 방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비정규 노조가 여럿 생겨났다.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는, 혹은 만들어져야 할 비정규 노조도 많다. 이러한 노조들이 어떻게 탄생하고 성장하는지(혹은 쇠퇴하는지), 협상과 투쟁, 조직화 방식은 어떠한지 우리는 잘 모른다. 그렇기에 더 많이 만나 이야기하고, 기록하고, 공유해야 한다. 거대한 변화는 흔히 작은 이야기에서 시작하는 법이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상임활동가 (ilecdw@naver.com)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