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혜경 노동법 박사

1929년 원산 노동자 총파업, 1930년 5~6월 신흥 장풍탄광 노동자 파업투쟁에 이어 평양고무공장 노동자가 파업을 선언했다. 커다란 폭력적 파업투쟁이 벌어졌다.

조선고무공업에서 평양고무공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생산량으로 보나, 노동자 집중상태로 보나 큰 비중을 점한다. 조선 고무공장에서 서울이나 부산 등 다른 지방에 비해 평양에서 파업 발생건수가 빈번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평양은 서울보다는 다소 늦은 1922년 무렵부터 공장이 들어서기 시작해 1928년에는 적어도 8개의 공장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33년에는 18개 공장으로 증가했다가 1936년에는 3개가 줄어 15개가 남았다.

그런데 평양이 서울보다 공장이 적었는데도 서울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평양에서 파업이 끊임없이 격렬하게 전개된 이유가 뭘까. 1930년의 평양고무공장의 파업의 폭력성은 다른 파업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우선 평양지역의 고무공장은 대부분 조선인이 경영했다. 공장주들은 원료 구입이나 자본 조달 등에서 일본인보다 상대적으로 불리한 조건에 있었기 때문에 임금인하를 통해 불리함을 보충하려 했다. 둘째, 도시 일정 지역에 공장이 밀집해 있어 노동자들이 비슷한 처지나 조건의 인식에 기반해 공동의 계급의식이 형성될 가능성이 높았다. 셋째, 이 지역에서는 일찍부터 노동단체를 비롯한 사회단체들이 활발하게 활동해 평양직공조합이 노동자 교양을 담당하고 적극적으로 활동한 것이 영향을 미쳤다.

1930년 8월 평양고무공장 노동자들의 총파업은 같은해 5월 일본인이 경영하는 구전(久田)공장이 도화선이 됐다. 이 공장의 여공 92명은 임금인하와 보증금제도 및 불량품에 대한 벌금제도에 반대해 동맹파업을 했는데, 공장주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 자신의 요구조건을 관철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임금보다 많은 벌금에 저항

평양고무공장의 파업에서 가장 중요한 요구도 임금인하 반대와 벌금제도 반대였다. 당시 조선일보에는 1930년 5월에 있은 평양 구전고무공장 파업 당시 이 공장의 불량품에 대한 벌금제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었다.

“불량품에 대한 벌금제도는 ‘누진법’이어서 처음 켤레는 5전, 두 번째 켤레는 10전, 세 번째 켤레는 45전이다. 이 공장에서 파업이 일어나기 전 7~8개월간에는 검사원이 하루에 한 사람 앞에 6켤레씩이나 불량품을 내어 벌금을 제하면 월급이 거의 남지 않았으며 심지어 벌금이 임금보다 10~12전이 많을 때도 있다.”

임금인하와 불량품에 대한 벌금제도처럼 노동자 착취가 강화되자 노동자들은 7월 하순에 정창(正昌)공장 파업이 해결되지 못한 상태에서 지역 내 공장주들이 공동으로 임금인하 결정을 하게 되자 평양고무공장의 전 노동자가 총파업을 단행했다.

임금인하에 대한 평양고무공장주들의 선포가 있은 8월1일 평양고무직공조합에서는 긴급 집행위원회를 소집하고, 7일 오후 1시 백선행기념관에서 고무공장노동자 대표가 모여 공장주들의 정체를 폭로했다. 10일에는 전체 파업노동자들의 대회를 열고 파업단의 20개 요구조건을 결의, 관철할 때까지 일치단결해 투쟁할 것을 맹세했다.

8월10일 파업노동자대회 결정을 발표한 후 월급노동자들인 기계공 300여명이 제화공 파업을 지지하며 그들도 같이 파업에 들어갔다. 12일에는 기계공들의 대회를 열어 직공측이 승리하기 전까지는 취업하지 않을 것을 결의했다. 기계공들은 노동계급의 공통적인 이익을 위해 파업을 단행했고 이러한 파업의 기세는 앙양돼 산십조(山十組)제사공장 노동자도 동정파업을 벌였다. 평양연초 공장에서도 동정파업을 하고 청년단체도 고무공장 노동자들의 파업을 적극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8월13일 공장주들은 파업단이 다음날까지 정식으로 취업하지 않으면 해고하고 새로운 직공을 모집하겠다고 위협했다. 14일 아침에는 예정대로 평양고무공장에서 취업 사이렌이 울렸지만 10개의 공장 중 6개 공장에 14명이 출근할 따름이었다. 당시 조선일보는 8월15일에는 한 사람도 출근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공장습격과 폭동으로 번진 파업

공장주들의 신직공 모집과 조업 개시 계획이 완전히 파탄났다. 공장주들은 파업단 대표단과의 회견을 요청했다. 노동자들은 8월17일 대회를 열고 전권위원 12명을 선정해 문제해결을 일임하기로 했다. 전권위원들은 자본가에 굴복했고 결국 파업노동자들은 전권위원 불신임을 결의했으며 일본 경찰의 조정안도 거부했다.

반자본가 투쟁은 일제 경찰과의 직접적인 충돌로 이어졌다. 노동자들은 파업 지도부에 있는 기회주의자를 대열에서 축출, 파업본부를 평양 노동연맹본부에서 다른 곳으로 옮겼다. 8월20일 이후 평양고무공장 노동자 파업투쟁은 새로운 투쟁단계로 넘어간다. 바로 파업의 폭동화다.

파업 노동자들은 8월23일부터 공장을 습격하고 폭동을 일으켰다. 파업이 폭동이 된 직접적인 원인은 공장주들이 일본 경찰의 비호 아래 노동자의 요구를 무시하고 신직공을 모집해 조업을 개시한 것에 분노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몇몇 기계공들과 낙후한 노동자층이 동지의 이익을 배반하고 일제의 탄압과 공장주들의 꾐에 빠져 승리에 대한 자신감을 잃고 취업한 것에 대한 분노 때문이다.

8월23일 오후 1천여명의 노동자들은 시위 끝에 정창, 내덕, 서경 등의 공장을 습격했고 기마경찰들과 충돌해 희생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를 발단으로 그날 저녁에 또다시 구전·세창공장을 습격해 일제 경찰과 충돌이 이어졌다. 폭동의 양상은 치열했다. 8월29일까지 16차례 습격이 이뤄졌다. 습격인원수는 5천여명에 달했다. 8월26일까지 일제 경찰에게 검속당한 인원은 63명이다. 평양고무공장 노동자 폭동은 일제 경찰과 직접적인 충돌이었고, 일제 경찰의 강력한 진압과 검거선풍으로 파업의 기세가 급격히 약화되면서 파업은 종식되고 말았다.

조선일보 1930년 8월27일자에 의하면 “평양고무공장의 파업직공의 소란이 더욱 맹렬해짐에 따라 평양경찰서의 경계도 극히 엄중해졌으나 파업 직공들의 소동은 그칠 사이가 없어 전 평양의 인심은 소란…….”이라고 당시의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평양고무공장 노동자들의 폭동투쟁이 가지는 의미를 짚어보자. 첫째, 외부로부터의 어떠한 도움도 거의 없이 자본가와 일제에 맞서 강렬하고 지속적으로 투쟁을 벌였다는 점이다. 투쟁의 성격이 일제와 일제에 기생하는 자본가들을 저주하고 노동계급의 해방과 자유를 선전했다는 점에서 정치적 성격과 폭력적 성격을 모두 띠고 있었다.

둘째, 경찰은 강압적인 방법으로 파업을 진압하고 다수 노동자들을 검거했지만 다음해인 1931년에도 여러 고무공장에서 파업이 끊임없이 발생했다. 1933년과 1935년에 연이어 고무공장 파업이 발생하면서 파업은 반제민족해방 투쟁으로 전진하는 양상을 보였다. 즉, 1931년 5월 평원고무공장 직공 파업, 7월 세창고무공장 파업, 8월 대동고무공장 파업, 대성고무공장 파업, 금강고무공장 파업 등 평양 내 각 고무공장에서 파업이 쉴 새 없었다. 평원고무공장과 세창고무공장 파업에서는 공장습격이 뒤따르는 등 폭력투쟁이 이어지면서 평양고무공장 노동자 파업이 반제민족해방투쟁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된다.

노동법 박사 (laborkyung@hanmail.net)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