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돼지저금통 배를 갈랐다. 오래 먹인 것이었다. 와르르 쏟아진 은빛 동전이 적지 않아 주말 아침 빈속인데도 배가 불렀다. 꽁돈일리 없지만 횡재를 한 기분이다. 오래전 까짓거 시험 좀 못 봤다고 형한테 불려가 혼이 난 나는 분을 참지 못하고 반지하방 방충망을 뜯고 가출했다. 집 구석에 있던 빨간 저금통 하나를 들고 나섰는데, 묵직한 것이 참 든든했다. 친구 집에 자리 잡고 배를 갈라 쏟아 보니 갈색빛 십원짜리만 가득했다. 오백원쯤 탑을 쌓았을까, 문이 벌컥 열리며 아버지와 형이 나타났다. 가출은 하룻밤을 채 넘기지 못하고 미수에 그쳤다. 좀 컸다고 할 말 거침없이 하고야 마는 사춘기 초입 딸아이와 함께 수북한 동전을 분류했다. 종종 나오는 외국 동전을 보면서는 여행지 얘기를 했고, 오래된 백원짜리 연도를 확인하면서는 그 시절 역사 얘기도 잠깐씩 보탰다. 밑천이 접시 물같아 할 말이 금세 말랐는데, 그중 1980년에 대해서는 몇 마디 할 수 있었다. 마침 딸아이 생일이 항쟁의 날이니, 아빠는 읽고 보고 들었던 기억 바구니를 애써 끌어올렸다. 깊지 않은 우물이 말라 간다. 한때, 내 주머니 속에 들어 큰 기쁨이었던 동전은 점차 그 쓸모를 잃어 간다. 스마트폰 금융 앱 속 숫자를 더하고 빼는 것에 익숙해 간다. 1980년의, 1987년의 동전이, 또 2014년과 2017년의 동전이 누구의 손을 거쳤을까를 상상해 본다. 그 시절의 함성과 눈물과 환희 따위를 떠올린다. 메마른 기억의 우물을 채워 본다. 용돈이라고 오백원짜리 몇 개 받아 들고는 신나서 동네 무인 과자가게로 달려가는 아이를 본다. 변치 않는 것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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