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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적인 직장내 괴롭힘과 잦은 출장으로 과로에 시달리다가 목숨을 잃은 노동자에게 산재가 인정됐는데도 사용자가 산재를 취소해 달라는 취지의 소송을 제기해 논란이 일고 있다. 유족측은 손해배상 책임을 덜어 내려는 의도로 보인다고 비판했다.

외근 중 지하철서 쓰러져, 원거리 출장 반복

24일 <매일노동뉴스> 취재에 따르면 서울행정법원 행정3부(재판장 최수진 부장판사)는 케이블 제조 중견기업인 대원전선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요양급여 승인결정취소 소송에서 최근 각하 판결했다. 각하는 소송요건의 흠결이나 부적법 등을 이유로 본안심리를 거절하는 것이다.

대원전선 직원 A(사망 당시 44세)씨는 2021년 6월17일 외근 후 복귀하던 중 서울 지하철역에서 쓰러진 채 역무원에게 발견됐다. 2020년 9월 입사한 지 9개월 만이었다. 병원에서 급성 심근경색을 진단받아 수술했지만 허혈성 뇌손상으로 3개월여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후 근로복지공단 조사결과 과로와 직장내 괴롭힘이 드러났다. A씨는 주로 케이블 제품과 관련해 기업 영업을 담당하며 외근과 출장이 잦았다. 2021년 1~5월 사이 한 달에 한 번꼴의 지방출장이 6월 들어 급격히 늘었다. 외근은 주 평균 1회 정도였지만, 쓰러지기 전 10일간 지방출장을 3번 넘게 다녀왔다.

특히 원거리 출장이 많았다. 서울에서 대구까지 1박2일 출장을 다녀오고, 당일치기 출장도 있었다. 쓰러지기 전날에는 새벽 3시께 출발해 오후 6시에 복귀했다. 사고 당일에도 오전 6시20분에 회사로 출근해 업무를 보다가 출장 갔다 돌아오는 길에 쓰러졌다. 그는 쓰러지기 직전 아내에게 전화해 “가슴이 몹시 답답해 병원에 진료를 문의했다”고 호소하기도 했다.

“인간 아니잖아, 동물이랑 똑같지” 폭언

업무강도도 높았던 것으로 파악됐다. 지방출장시 전선 파손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공사현장 건물의 각 층을 13~14차례 왕복했다. 거래처와의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 역시 상당했다. 유족측은 원재료 단가 인상으로 거래처가 계약해지를 압박했다고 주장했다.

무엇보다 직장내 괴롭힘에 시달린 것으로 조사됐다. A씨의 인력 충원 요청에 팀장 B씨는 “인간이 아니잖아. 동물이랑 똑같지” 등의 폭언을 퍼부었다. B씨는 평소에도 A씨에게 반말과 인격 모독성 발언을 일삼은 정황이 드러났다. 견디지 못한 A씨는 팀장의 발언을 녹음했다. 서울지방고용노동청은 그해 7월 직장내 괴롭힘을 인정하고 개선지도를 주문했다. 하지만 회사는 B씨를 ‘견책’ 징계로 끝냈다.

공단은 지난해 2월 A씨의 질병을 업무상 재해로 인정했다. A씨의 주당 평균 업무시간은 4주간 42시간20분, 12주간 39시간29분으로 고용노동부 고시의 과로 기준에는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열흘간 지방출장을 3번 이상 다니며 피로가 누적된 점 △거래처의 계약해지 압박으로 정신적 긴장 상태에서 업무를 수행한 점 △직장내 괴롭힘 문제로 정신적 스트레스가 상당했던 점 등을 근거로 업무와의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했다.

‘손배 책임, 산재 공표’ 우려에 떤 회사

문제는 회사의 태도였다. 사측은 지난해 8월 요양급여를 취소해 달라고 소송을 냈다. 유족이 회사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 소송에 대비하는 목적이었다. A씨의 산재가 인정되면 산재 건수와 재해율 등의 ‘공표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취지로 항변했다. 반면 유족측은 회사가 공단 처분의 상대방이 아니므로 법률상 이익이 없다고 반박했다.

법원은 본안 판단도 거치지 않은 채 사측 청구를 각하했다. 재판부는 “이 사건 처분은 사업주인 원고를 직접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원고에게 직접적으로 의무를 부과하거나 권익을 제한하는 법률효과를 발생시키는 침익적 행정처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민사상 손해배상책임’에 관해서도 민사사건 심리를 통해 결정될 문제라고 일축했다.

산재 발생 ‘공표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측 주장에도 선을 그었다. 재판부는 “상병이 업무상 재해로 인정된다고 해서 곧바로 산업재해 발생건수 등의 공표대상이 된다거나 산업재해를 고용노동부 장관에게 보고할 의무 등을 부담하게 된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만약 처분 가능성이 있더라도 불복절차를 거칠 수 있다는 것이다.

유족측은 ‘악의적인 소송 제기’라고 비판했다. 김용준·김위정 변호사(법무법인 마중)는 “사측이 소송을 낸 이유는 민사소송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자 하려는 의도로 보인다”며 “민사소송 내에서 다투면 될 일인데, 굳이 유족이 인정받은 부분까지 건드렸다는 점에서 상당히 악의적”이라고 지적했다.

기업의 ‘산재 승인’ 취소소송은 그치지 않고 있다. 하지만 90% 이상이 패소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윤건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해 10월 근로복지공단에서 받은 ‘요양급여 관련 소송 자료’에 따르면 최근 5년간 확정된 판결 85건 중 3건을 제외하면 기업이 모두 패소했다. 기업이 공단을 상대로 소송을 걸어 승소한 비율이 3.5% 수준에 불과했다.<본지 2022년 10월11일자 2면 “[96.5% 패소하는데] 산재 기업들의 ‘뻔뻔한’ 불복소송 5년간 114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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