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명교 플랫폼C 활동가

민주노총이 이달 24일 임시대의원대회에서 정치방침과 총선방침을 결정할 예정이라고 한다. 양경수 민주노총 위원장과 이양수 부위원장 등 인사들은 이 안을 어떻게든 통과시킬 태세다. 일각에서는 현재의 대의원 구도상 통과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고, 다른 일부는 통과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예견한다.

지난 2월15일 칼럼에서 밝혔듯, 민주노총 총선방침(안)은 많은 과정을 누락하고 있다. 본안은 초안에 비해 좀 더 다듬어졌음에도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실천의 공백을 면밀한 분석과 대안보다는 의지주의로 덮고 있다. 다분히 기술적인 방안에 치중했기 때문에 상층부의 공상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정치방침(안)을 두고 이야기해 보자.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당위성과 목표·방향 등을 설명하는 1~3항에는 큰 이견이 없을 것이다. 한데 “진보 민중세력 및 진보정당과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구축하고 노동중심성이 확보될 수 있도록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추진한다”고 서술된 4항 ‘실현경로’는 정치방침(안)과 총선방침(안)이 상정하는 녹색당이나 정의당에서 공감을 얻을 수 없는 서술에 가깝다. “노동중심성”이라는 오래된 테제를 염불 외듯 반복하는 것으로는 한참 부족하기 때문이다. 노동 착취와 식민지 수탈, 초국적자본에 의한 주변부 자원 수탈, 생태계 파괴를 통한 기후위기 등으로 이뤄진 오늘날의 자본주의 체제에 맞서려면 단순히 기존의 계급 착취에만 시선을 가둬선 안 된다. 젠더 지배와 인종주의, 제국주의를 아우르는 폭넓은 시야와 연대를 통한 ‘대항 헤게모니’를 구축해야 한다. 양경수 위원장안은 이런 문제의식 자체를 결여하고 있다. 협소한 시야로는 한국 사회와 여론지형에 제대로 개입하는 당을 만들 수 없다.

4항은 원안 수정으로 넘어간다고 치자. 진짜 문제는 그 다음이다. 5항의 문구는 “여러 진보정당이 각자도생하는 방식이 아니라 진보정치세력이 대단결 하는 노동중심의 진보정당 건설을 통해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추진한다”인데, 이것과 4항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있다. 실제로는 4항 이후 여러 단계의 실천을 거쳐야만 5항의 실현이 가능한데, 이런 과정을 깔끔하게 누락하고 있다. 이를 ‘안’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더구나 이번 임시대의원대회에 상정된 정치방침안은 중앙집행위원회에서조차 동의를 얻지 못해 위원장 직권으로 상정된 안이다. 다수 산별노조 위원장들의 동의도 얻지 못한 상황에서 “조합원 여론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며 안을 밀어붙이는 것은 대의원수를 많이 확보했다고 확신하는 다수파의 패권주의로 비칠 수밖에 없다. 제도정치에서도 이런 시도는 비난받기 십상이다.

실제 2007년 민주노동당을 선도 탈당해 이후 진보신당을 건설한 그룹은 당시 위기의 원인을 “자주파의 패권주의에 있다”고 평가했고, 누구도 이런 평가를 정정한 바 없다. 2012년 선도 탈당했거나 잔류했던 그룹들 중 통합진보당 건설에 함께했던 모든 그룹이 경험한 상처도 아직 아물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제대로 된 논의 없는 밀어붙이기는 이런 트라우마를 소환할 수밖에 없다.

이양수 부위원장이 지난 2월21일자 <매일노동뉴스> 기고문에서 밝혔듯, 민주노총은 지난 10여년간 노동자 정치세력화 실패에 대한 평가를 되풀이해 왔다. 그렇다면 이렇게 오랫동안 여러 차례 평가를 되풀이했음에도 진보정당운동이 여전히 위기에 빠져 있고 노동자 정치세력화 프로젝트가 요원한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노동운동 내 각 그룹이 교통 없이 평가해 왔기 때문이다. 평가는 수없이 했지만 각 정당들의 평가가 제각각 다르고 교집합이 거의 없다. 심지어 당 안에서도 견해차를 드러내는 것은 물론 스펙트럼이 폭넓게 분포해 있다. 이런 상황에서 평가가 충분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둘째, 지난 실패에 대해 민주노총 내에서도 제대로 평가되지 않았다. 경험 많은 상층부 활동가나 간부들이야 지겹게 들은 이야기겠지만, 대다수 조합원들은 매우 충격적이었던 10여년 전의 실패를 돌아볼 기회가 없었다. “하나로 뭉쳐야 하지 않겠습니까?”라는 말만 공허하게 맴돌 뿐이다.

셋째,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단순히 정당을 만드는 문제나 선거 방침에 국한되지 않음에도 10년 동안 정치세력화를 둘러싼 사업이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복수의 진보정당으로 분열된 상황에서 불가피한 측면이 있지만, 변화된 상황에 맞게 노동자들의 정치활동이 어떻게 전개돼야 하는지 등을 담은 갱신된 정치세력화 프로그램이 지속돼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이렇게 해서 발생한 공백을 갑작스러운 연합정당 건설로 이룰 순 없다.

실제 연합정당은 가능하지도 않다. 녹색당 당원 다수는 아예 그럴 마음이 없고, 정의당은 각종 계획이 중구난방으로 나오고 있지만 당 내에서 제대로 된 토론이 이뤄지고 있지 않다. 심지어 정의당 내에는 “진보정당 하지 말자”(조성주)라거나, 보수정당들 내의 자유주의자들을 묶는 구상을 갖는 이들도 혼재한다. 양경수 위원장안이 통과되더라도 진보당 외에 다른 진보정당들이 이를 수용할 가능성은 제로고, 이러한 조건에서 “노동중심의 진보대연합 정당”이라는 비전은 거짓말이다.

통과를 밀어붙이려는 사람들도 이러한 사실을 모르지 않다. 그럼에도 왜 진지하고 성찰을 담은 정치세력화 대신, 이 안의 통과를 밀어붙이려는 것일까? 현실적으로는 민주노총의 진보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를 관철하고자 하는 의지라고 볼 수 있다. 민주노총 내에는 다른 진보정당 당원도 많은데, 이것이 무리하게 관철됐을 때 어떤 내부 갈등이 폭발할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사실 ‘반대’만으로 대안을 말할 순 없다. 그러니 ‘안’이라도 내놓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책임 있는 자세라고 볼 수도 있다. 애석하게도 ‘단결’과 진정한 전진을 위해선 통과시키기 어려운 안이지만 말이다. 그러니 이번 안은 쓰라린 마음으로 부결돼야 하지만, 그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지역과 현장에서부터 정치세력화를 재생시키고, 다른 입장과 평가들이 솔직하고 진지하게 교차할 수 있는 제대로 된 논쟁을 시작해야 한다. 이를 밑거름 삼아, 시민사회운동과 함께하는 새로운 정당 건설 등 제대로 된 정치방침을 수립해 중장기적인 한국 사회 변혁의 전망을 제시해야 한다. 그럴 책임과 힘이 오늘날 민주노총과 사회운동 모두에게 있다.

플랫폼C 활동가 (myungkyo.ho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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