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혜경 노동법 박사

전국적 노동자조직의 출현

1920년대 초까지 노동자들이 전국적 유대를 갖기 위한 구체적 노력이 없었다. 1920년 3월16일 조선노동공제회가 발기하면서 전국적인 노동자단체를 구성하려는 시도가 나타났다. 1922년 10월 결성된 조선노동연맹회가 그 뜻을 이어가려 했다. 하지만 조선노동연맹회는 “사회주의 지식인 노동자들만으로 조직된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주의적 강령을 가진 노동단체”였다. 사회주의적 사상을 가진 소수파로 창립돼, 그로 인해 조직이 해체되는 등 혼란에 빠져 있다가 1924년 4월에 이르러 조선노농총동맹을 결성했다. 드디어 조선노동자가 전국 단일한 노동자조직을 갖게 됐다.

조선노동운동사상 전국적 노동자조직의 대두는 중대한 의의를 가진다. 전국적 노동자조직이 결성되기 이전의 노동운동은 자연발생적 성격을 띠고 전개돼 노동운동의 발전에 한계가 있었다. 노동공제회를 비롯한 조선노농총동맹이라는 전국적 조직이 결성되면서 노동운동은 자연발생적 성격을 지양하고 노동운동의 결과물이 전국적 조직으로 구체화됐다. 노동운동의 확대, 발전뿐만 아니라 반일민족해방운동의 확대에도 기여하게 된다.

조선노동공제회가 전국 각지의 주요 도시들에서 지역과 직업에 따라 다수의 노동조합을 조직하기 위해서 활동하면서 서울의 인쇄직공조합, 전차종업원조합, 이발직공조합, 자유노동조합 등이 노동공제회의 지도와 역량에 의해 조직됐다. 조선노동연맹회가 1923년에 경성고무 여자직공의 파업에서 뛰어난 지원활동을 하고 기타 서울지역에서 1922년 12월부터 1923년 7월에 이르는 시기에 양말과 고무, 양복 노동자들의 파업을 지원하고 다수의 노동조합을 조직했다. 조선노농총동맹이 1924년 9월 초 서울에서 일어난 용산제등고무공장 노동자 200여명의 파업, 1925년의 2월의 경성 대동인쇄노동자 150여명의 파업 그리고 1925년 1월부터 3월에 경성전기회사 500여명의 파업을 직접 지도했던 점 등 전국적 노동자조직이 노동운동을 지도함으로써 노동운동의 자연발생적 한계점을 극복하고 노동운동이 확대·발전했다. 뿐만 아니라 조직적 결과물을 전국적 조직으로 구축해 반일민족해방운동으로 결합·발전하게 됐다.

환난상구에서 신사회 건설로

1910년대 이전 또는 1920년대 초기의 단체들은 그 명칭이 보여주는 것처럼 계, 친목회, 공제회 등 다분히 친목적인 상호부조의 단체였다. 그 후 점차 그 조직의 성격을 환난상구(患難相救)의 친목단체에서 노동자의 단결로 공동의 경제적 이익을 쟁취하려는 투쟁적인 경제단체로 발전했다.

구체적으로 보자. 조선노동공제회는 조직의 주요 목표를 노동자교육·경제·위생의 3가지 문제로 봤다. 이를 해결하는데 “교육은 노동자들의 인격, 능력, 품성 향상이요, 경제는 회원들이 당하는 환난구제(患難救濟), 실업자들을 위한 직업소개의 설치 및 생산, 소비, 저축을 위한 편의시설의 설치, 운영이며 위생은 개인위생 장려”라고 했다. 즉 조선노동공제회는 노동자들의 상호부조, 환난구제를 목적으로 단체를 조직하는 것이 필요했다.

조선노동연맹회의 강령과 선언문을 보면 “신사회의 건설”을 주장하고 “계급의식에 의한 일치단결”을 강조했다. 사회주의적 강령을 뚜렷이 제시하면서 노동자계급의 이해에 주목하고 노동자의 단결을 주장했다.

그리고 조선노농총동맹의 강령에서는 “신사회를 실현할 것을 목적” “최후의 승리를 얻을 때까지 자본가계급과 투쟁할 것” “각각의 복리증진, 경제향상을 기함”을 제기함으로써 명확하게 노동계급의 해방을 위해서는 자본가계급 투쟁해야 하고 노동자들의 단결이 요구된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조선노농총동맹의 임시대회 4개 항목에서는 “노동자 임금을 최저 1일 1원 이상” “노동시간은 일 8시간제로 할 것”을 주장했다. 조선노동공제회나 조선노동연맹회에서 보지 못했던 노동자들의 생활향상을 위한 구체적인 목표를 내세웠다.

조선노동공제회에서 상호부조, 환난구제 요구로 발전해 조선노농총동맹에서는 “노동계급의 해방”과 “신사회건설”을 주요 목적으로 내세웠다. 특히 구체적인 노동자의 생활이익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직의 성격이 단순한 환난상구의 친목적 단체로부터 노동계급과 대립하는 자본가계급과 투쟁하고 노동자들의 단결에 의해 공동의 경제적 이익을 쟁취하려는 투쟁적인 경제단체로 성격이 변화·발전했다.

노동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의 결합

노동운동은 일반적으로 임금노동자들의 처지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으로 귀착한다. 이런 노력을 저해하는 요인 속에 비경제적인 요소가 존재하는 경우에는 노동운동이 결코 단순한 계몽운동이나 경제투쟁의 영역에 머무를 수 없게 된다.

일제는 1925년 치안유지법을 공포한 이래 노동자를 노골적으로 탄압하는 편파적 태도를 취했다. 노동운동은 단순한 경제투쟁을 넘어 일제를 반대하는 반일 민족해방투쟁의 일환으로 변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노동자들이 임금인하에 반대하고 노동시간 단축을 위해 노력할 때, 그런 조건에 대해 노동자와 기업체 자본가가 서로 타협하는 경우는 드물다. 자본가를 옹호하는 거대한 권력기구인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통치자와의 대결에 의해서 근로조건이 결정된다는 사실을 체험한다면 노동자들은 민족해방 없이는 결코 자기들의 처지나 근로조건이 근본적으로 개선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식민지 노동운동은 반제민족해방운동으로 발전하지 않을 수 없는 역사적 필연성을 가진다.

일제 식민통치체제로 노동자들의 삶이 근본적인 위협을 받을 때, 노동자들은 그들의 권익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개별 자본가와 대립하는 것에서 나아가 일제 식민통치 자체에 대항하는 반일 민족해방투쟁으로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1929년의 원산총파업은 원산 교외에 있는 라이징선 석유회사 문평유조소 노동자들의 파업이 발단이 됐지만, 원산의 총자본과 식민지 권력기구에 대항한 노동자들의 총체적 투쟁으로 확산됐다. 13개도 53개 지방을 포괄하는 광범한 인민계층의 지지와 참가로 이어지면서 전국적·전인민적 투쟁으로 나아갔다. 자연발생적이고 분산적인 투쟁에서 나아가 폭력적인 투쟁으로 발전했다. 이런 점을 볼 때, 식민지 노동운동은 반제민족해방투쟁의 일환으로서 일제의 식민통치를 반대하고 민족해방을 쟁취하는 것만이 식민지에서 노동자들이 정당한 권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식민지 노동자에 대한 일제의 체계적인 수탈과 착취는 식민지 노동운동이 단순한 개별 자본가와의 대립·투쟁에서 나아가 식민지 수탈체제에 전면적으로 대항하는 반일 민족해방투쟁으로 가는 역사적 필연성을 확인시켜 준다. 결국 식민지 노동운동이 반제 민족해방투쟁으로 발전하는 과정은 1930년대 신흥 장풍탄광의 폭력적 폭동, 1930년대의 평양의 고무공장 노동자들의 폭력적 습격 등으로 나타나면서 일제시대의 노동운동의 본질적 성격을 규정하게 된다.

노동법 박사 (laborkyu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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