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건준 아유 대표

나는 순수하지 않다

식물과 동물과 인간은 모두 박테리아의 결합으로 생겨난 뜻밖의 결과물이다. 한 종류의 박테리아가 다른 종류의 박테리아 내부에 거주하면서 더 복잡한 세포를 형성하는 과정을 통해서 생물이 탄생했다. 이를 밝혀 낸 마굴리스는 “우리는 걸어 다니는 공동체”라고 했다. (팀 잭슨, <포스트 성장 시대는 이렇게 온다>) 부드럽게 말하면 인간은 다양한 박테리아가 섞여 만들어졌고, 격하게 말하면 인간은 박테리아의 잡탕이다.

인간은 자신의 뿌리를 잊었거나 혹은 다양한 것의 공동체인 자신의 근본을 숨기려는 듯 순수를 추구한다. 다양한 어울림보다 자신이 추구하는 것을 중심에 놓고 다른 것을 배제한다. 그 하나가 민주주의 속에서 자라나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진영논리다. 우파는 좌파들이 권력을 가지면 나라를 망칠 것처럼 떠들고, 좌파는 우파가 권력을 가지면 사회를 망가뜨릴 것처럼 주장한다. 모든 것을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사람은 시장 논리가 끼어드는 것을 오염으로 여긴다. 모든 것을 시장 논의에 맡기라는 사람들은 국가가 끼어드는 것을 시장의 순수성을 해치는 일로 여긴다.

지금도 “역사를 팔아 미래를 열 수 없다”며 상대를 친일로 몰고, 반일이 한일관계를 망친다며 “역사에 붙잡혀 미래를 망칠 수 없다”는 주장이 엇갈린다. 일부에서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둘러싸고 러시아·중국·북한을 지지하면서 반미의 흐름을 만들려는 사람과, 한미일 동맹을 위해 반북 대결을 고조시키는 사람들이 엇갈린다. 동북아평화를 생각하면 반일이나 친일로 패거리 짓는 것이 오히려 위험을 증가시킨다. 시민 다수는 이런 진영에 붙잡혀 살지 않는다. 그래서 특정 이데올로기에 붙잡히지 않고 적정한 삶을 찾아가는 평범한 시민이 군자(君子)에 가깝다.

진영은 약하고 세계는 험하다

진영을 키울수록 더 강해지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반대다. 공동체를 통합할 역량이 취약하기에 진영으로 갈라진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더욱 험악해진 세계질서에 ‘신냉전’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사람도 있지만,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이데올로기로 갈라진 20세기의 세계질서와는 분명히 다르다. 때문에 ‘다극화’로 부른다. 이는 분명 금융위기로 다시 흔들리고 기후위기와 저성장에 빠진 자본주의의 구심력, 미국 중심의 질서가 후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한국은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을 시대정신을 중심으로 통합되지 못하고 한쪽은 산업화의 추억에 사로잡혀 친미와 친일 편향으로 내달리고, 다른 쪽은 민주화의 기억에 사로잡혀 반미와 반일 편향으로 내달린다. 산업화의 물질적 기반과 민주화의 정신적 기반도 취약한 세력들은 사회를 통합할 역량을 갖추지 못하고 서로를 향한 날 선 공격을 반복한다. 점점 험해지는 진영 논리는 진영의 취약함 때문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민주주의에서 이견은 당연하고 갈등도 당연하지만, 지금은 그런 상식을 넘어서 있다. 때문에 세계 곳곳에서 민주주의의 위기를 걱정한다.

물질적·정신적 기반이 취약한 진영을 강화할수록 세계는 엉망이 돼 간다. 전쟁과 보호무역으로 균열되는 세계, 뚜렷한 해결책 없이 점점 고조되는 기후위기, 정치가 약화된 국내 정치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불안한 세계질서 속에서 중국의 대만침공에 대한 우려는 일부의 우려를 넘어 곧 다가올 수도 있는 시나리오로 퍼졌고, 급기야 한반도에서의 전쟁 가능성을 언급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이러다가 기후위기로 인류 멸종의 위기에 처하기 전에 최악의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 낮에는 태극기, 밤에는 인공기를 내걸었던 70여 년 전 한반도의 끔찍한 운명을 반복할 것인가.

권리의 세계를 벗어난 시민들

늘 단일한 시민은 없었다. 지금도 그렇다. 격해진 편향의 한쪽 대열에 흡수되는 시민들은 서로 다른 진영에 안겨 비록 진영논리의 포로일지라도 소속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런 진영으로부터 공격받는 시민단체들은 무기력의 끝에 반감을 느끼고 분노를 분출하며 또 다른 편향으로 내몰리기도 한다. 어떤 편향에 속할지라도 결국엔 그들 모두가 공동체의 구성원이라는 사실을 잃지 않는다면, 그것은 편향이 아니라 다양성이다. 이 사실을 잊으면 그것은 다양성을 벗어난 극단이 되고 만다.

우리는 국가와 시장 사이에서 살아 낸다. 강력한 권력이 작동하는 국가의 편향에 빠지면 파시즘이든 맑시즘이든 험악한 결과를 낳았다. 강력한 이익이 작동하는 시장의 편향에 빠지면 기업가든 노동자든 탐욕적 결과를 낳았다. 공동체의 앙상블을 위해선 국가와 시장 사이에서 균형을 잡을 탄탄한 시민사회가 필요하다. 그런데 “공익을 위한 시민의 대변자라는 이미지에서 출세나 권력, 사적 이익을 좇는 이익단체란 부정적 이미지”(이창곤, 3월21일자 한겨레, ‘거대한 후퇴의 시대’ 시민단체가 위기인 이유 있는 이유)에 휩싸였다. 이는 ‘권리의 세계’를 탄탄히 지켜야 할 시민단체가 ‘권력의 세계’나 ‘이익의 세계’로 이탈했다는 것이다.

인권운동, 여성운동, 장애인운동, 성소수자운동, 이주민운동, 기후정의운동을 비롯한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는 단체들은 모두 ‘권리의 세계’에 있다. 권력에 종속된 단체를 시민사회로 보기 어려운 것은 그 단체가 진보적인지 보수적인지의 기준 때문이 아니라 ‘권리의 영역’을 이탈해 ‘권력의 영역’에 종속됐기 때문이다. 경제인단체를 시민사회 영역으로 보지 않는 것은 그들이 보수적이냐 진보적이냐의 기준이 아니라 그들이 추구하고 지키려는 것이 ‘이익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일하는 시민이든 일하지 않는 시민이든, 노동권 중심의 노조든 다양한 권리를 중심으로 하는 시민단체든, 만나야 할 곳은 ‘권리의 오작교’다.

잡파 월드를 위한 공론장

세상은 언제나 ‘잡파 월드’였다. 순수에 집착한 좌파들로 평평해진 세상도, 단일화에 집착한 우파들로 일체화된 세상도 누군가를 억압하는 위험한 세상이었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잡파 선언’이다.

첫째로 우리는 ‘존재적 잡파’다. 인간의 세포는 박테리아의 혼합으로 이뤄진 잡탕에서 출발했다. 우리는 단선적 관계가 아닌 다중적 관계 속에 살아간다. 우리 심리는 단순한 것이 아닌 다양한 것으로 엮여 있다. 둘째로 지금 세계는 ‘상황적 잡파’를 필요로 한다. 격화하는 진영논리는 세계를 위험스럽게 분할한다. 남북대결을 부추기는 한반도의 험악한 상황, 양당에 의해 양극화로 치달아 위험해진 국내 정치를 봐도 필요한 것은 진영을 넘어설 잡파다. 셋째로 지구별은 ‘미래적 잡파’를 원한다. 기후위기로 치닫는 지구별의 미래를 위해 잡다한 생명의 존재 다양성을 지킬 잡파가 필요하다. 넷째로 상황을 바꾸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이도 저도 아닌 것이 아닌 ‘단호한 잡파’다. 잡파에겐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강력한 기반이 있다. 그것은 애정, 우정, 다정한 감정들이 사회를 통해 승화된 ‘권리의 세계’다.

이익에 붙잡힌 거대기업과 권력을 추구하는 정파들은 상호작용을 통해 다양한 것들로 이뤄진 공유가치보다 그들의 단일 사상과 이념(이데올로기)을 숭배하기를 바란다. 때문에 공론장을 파괴한다. 초연결 사회의 접속은 개인들이 좋아하는 정보만을 집요하게 제공하는 알고리즘이 지배한다. 대다수 알고리즘은 편향적인 접속 노예를 만들어 잡파를 해체한다. ‘잡파 월드’는 이런 위험을 이겨 낼 공론장을 통해 재탄생할 것이다.

아유 대표 (jogjun@hanmail.net)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