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증장애인 이지숙씨가 지난 22일 서울지하철 서울 면목역에서 ‘장애인도 마을에서 함께 살자’라는 제목의 캠페인 활동을 하고 있다. 이씨의 일이다. <정기훈 기자>

55세에 신입사원이 된 사람이 있다. 서울시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에서 3년째 일하고 있는 이지숙(57)씨다. 평균 퇴직 연령이 49.7세인 것을 감안하면, 다른 사람들이 퇴직할 무렵에 입사를 한 셈이다.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공공일자리는 ‘노동할 수 없는 몸’으로 여겨져 민간 노동시장에서 배제돼 온 최중증장애인과 탈시설 장애인이 우선 고용대상이다. 이씨는 회사에서 권익옹호 활동, 장애인식개선 활동, 문화예술 활동을 하면서 유엔장애인권리협약을 지역사회에 알리고 정부와 지자체의 협약 이행을 모니터링하는 일을 한다.

뇌병변장애와 지체장애가 있는 그는 30여년 동안 민간 노동시장에서 배제돼 왔다. 9살때 가족이 길에 버렸고 경찰이 시설에 인계했다. 시설에서 운영하는 특수학교에서 직업훈련을 하는 ‘양재과’에 들어갔다. 하지만 가위질 같은 섬세한 작업을 하지 못해 국가기술자격증을 취득할 수 없었다. 특수학교 친구의 소개로 20~24살에 시다, 구로공단 자동차 부품공장, 목욕탕에서 일했다. 하지만 당시 비장애인보다 성과가 낮아서 욕도 많이 듣고, 임금도 낮게 받았다. 금방 그만둬야 했다고 이지숙씨는 회고했다. 정부에서 시행하는 장애인 일자리사업에 지원했지만 합격하지 못했다.

세상이 준 배제의 기억이 무의식에 짙게 자리 잡은 탓에, 이씨는 스스로를 ‘일할 수 없는 존재’로 여겼다. 자신이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런 그가 서울시에서 하는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를 알게 된 건 지인을 통해서였다. 이력서를 내고 면접을 본 다음에 합격 통보를 받았다. 2021년 4월 중랑구장애인자립생활센터 신입사원이 됐다. 마지막 일터인 목욕탕을 떠난 지 30여년이 지난 후였다.

국가가 보장하지 않은 권리만큼 이지숙씨가 할 일도 많다. 일부 지인들은 이씨에게 “기초생활수급비를 받는데 왜 일을 하냐”고 물은 적이 있지만, 그의 대답은 명확했다. “나의 노동으로 장애인의 권리가 보장받게 되면 수많은 장애인들이 혜택을 보게 된다.”

이씨를 포함한 공공일자리 노동자들은 지난 21일 서울 중구 서울시청 인근에서 행진하면서 지속가능한 고용과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일자리 제도화를 요구했다. 행진은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 사업 중 권익옹호 활동의 일환이었다. 이씨가 하는 일은 무엇일까. 왜 이 일자리는 지속돼야 할까. 노동을 통해 그의 삶은 어떻게 변화했을까.

업무보다 더 힘든 출근

장애인의 권리와 공공일자리를 알린다는 점에서, 기자와의 인터뷰도 ‘노동’이었다. 그는 “장애인들이 자신을 보고 삶에 희망을 가지면 좋겠다”는 말을 자주 꺼냈다. 그럼에도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마냥 좋을 리는 없었다. 인터뷰를 할 때 회사는 장애인의 권리에 대해 이야기 해 주기를 바랐다고 그는 말했다. “회사가 까라면 까야지. 내가 하기 싫다고 안 하면 안 되지”라고 말하는 그는 여느 직장인과 다름없었다.

그에게는 출근길부터가 ‘고된 노동’이다. 뇌병변장애를 가져 거동이 어렵기 때문이다. 이지숙씨는 성북구 길음동에 사는데, 중랑구에 있는 회사로 오전 11시까지 출근을 해야 한다. 지난 7일, 회사까지는 7킬로미터로 그리 멀지도 않은데 오전 8시40분에 ‘장콜’을 불렀다. 1시간 뒤에 올지 2시간 뒤에 올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직장인에게 예측 가능성은 생명과도 같은데, 회사에 일찍 도착할지 지각을 할지 알 수가 없다.

“장애인 콜택시가 저보다 빨리 오면 어떻게 하죠?” 오전 9시30분까지 이씨의 집에 도착하기로 한 기자는 초조해졌다. 그는 주변 대기자가 90명이 넘는다고 기자를 ‘안심’시켰다. 이씨의 집에 도착하니 그와 11년차 활동지원사가 TV를 보고 있었다. 10시12분이 되자 장콜 기사에게 도착했다는 연락이 왔다. 택시를 부른 지 1시간30분만이었다. 그의 출근을 돕는 활동지원사가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이지숙씨는 벽에 붙어 있는 지지대를 잡고 일어나 전동 휠체어에 올랐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갔다. 아파트 경사로를 따라 내려가다가 ‘대형 사고’가 났다. 휠체어가 모서리에 부딪혀 약간 부서진 것이다. 왜 출근을 노동이라고 하는지 이해가 됐다.

장애인의 권리를 생산하는 일

10시50분이 돼서야 회사에 도착했다. 콜택시를 일찍 부른 덕에 다행히 지각을 하지는 않았다. 11시 일정은 장애인 편의시설 모니터링이었다. 권리를 요구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어떤 권리를 가지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영상을 통해 편의시설과 관련한 여러 법들을 살펴보고, 어떤 기관에 어떤 편의시설이 설치돼야 하는지 배웠다. 오후 1시부터 이씨와 동료들은 버스커버스커의 벚꽃 엔딩 노래 가사의 일부를 개사하는 일을 했다.

최근 서울시는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일자리 수행 기관에 3년치 사업 내용을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서울시는 일자리 사업 내용 중 시위와 캠페인 횟수까지 체크했다. “직무활동 내실화”가 명분이었다. 노동자들은 일을 하면서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요구하기보다는 평화롭고 따뜻한 내용으로 개사하라”는, 일자리사업을 전담·관리하는 직원의 안내가 있었다. 이에 따라 노동자들은 ‘우리 함께 손을 잡고 함께 살아요 우리’ ‘비장애인도 함께 만들어 가요 아름다운 세상’ ‘여러 가지 색이 있는 무지개 같은 세상’ 등으로 가사를 바꿨다.

중랑구에 있는 서울지하철 면목역에서 캠페인을 할 때도 비슷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씨와 센터 직원들은 지하철에서 지나가는 시민들에게 △편리한 이동 △안정적인 주거 △건물 편의시설 △체육시설과 문화공간 △평등한 교육환경 △다양한 일자리 중에서 장애인이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스티커를 붙여 달라고 부탁했다. 활동을 시작하기 전 센터 전담직원들은 노동자들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서울시에서 시민들에게 민원이 들어온다고 하니 너무 강하게 스티커를 붙여 달라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지숙씨가 지하철역을 지나는 시민에 스티커 설문 참여를 호소하고 있다. 전동스쿠터 반사경에 비친 이씨의 표정이 밝다. <정기훈 기자>
▲ 이지숙씨가 지하철역을 지나는 시민에 스티커 설문 참여를 호소하고 있다. 전동스쿠터 반사경에 비친 이씨의 표정이 밝다. <정기훈 기자>

노동을 통한 삶의 변화

이지숙씨는 공공일자리를 하면서 월 50만~60만원이던 기초생활수급 생계급여가 9만원으로 대폭 깎였다. 그럼에도 이씨는 일을 하고 싶어 한다. 한 달에 약 95만원 정도의 월급을 받기 때문에 생계급여가 깎여도 20만~30만원은 더해지는 셈이다. 비록 적은 돈이지만 2년 동안 정기적으로 월급을 받으면서 그의 삶에 변화가 찾아왔다.

먼저 ‘받는 사람’에서 ‘줄 수 있는 사람’이 됐다. 기초생활수급비를 받기 때문에 그동안은 친구들이 밥과 커피를 샀다. 하지만 일을 시작한 후에는 친구들에게 사 줄 수 있게 됐다고 한다. 집도 넓어졌다. 그는 1년 가까이 모은 돈에 대출금을 보태 지난해 7월 46제곱미터(14평) 넓이의 재개발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원래 그는 23제곱미터(7평)짜리 영구임대아파트에 살았는데, 세탁기를 놓을 장소가 없어서 세탁소를 자주 이용하면서 돈이 많이 들었다고 한다. 신용불량자에서 탈출한 것도 큰 변화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 중 한 명이 자신의 카드로 ‘카드깡’을 한 후 도망가는 바람에 이지숙씨는 신용불량자가 신세가 됐다. 파산회생신청을 한 상태였다. 하지만 공공일자리를 하면서 은행에 가서 신용등급을 확인했더니 신용이 회복됐고, 교통카드와 신용카드도 발급이 됐다.

이씨는 지난해 12월에 회사에서 ‘모범상’을 받았다. 그는 “후배들에게 모범이 되고 싶다”고 했다. 중랑구장애인자립생활센터 전담직원인 오혜연 활동가는 “이지숙씨는 입사할 때부터 모든 직무를 앞장서서 열심히 했고, 그 모습이 변함이 없었다”며 “충분히 자격이 된다고 생각해 내부 회의를 거쳐 선정했다”고 말했다.

다양한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기

이지숙씨는 3년 동안 회사 동료들과 교류하면서 배려와 존중을 배워 가고 있다. 예전에는 동료가 이해가 안 되는 말이나 행동을 하면 “이게 아니고 이거야”라고 가르치려 하고 바꿔 놓으려고 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내 뜻대로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말을 할 때 한 번 더 생각하고 말하게 됐다. 그가 장애를 가졌다고 해서 장애를 가진 다른 동료에게 상처 주지 말라는 법은 없다. 자신보다 더 심한 장애를 가진 사람들도 있으니까, 무엇을 조심하고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을 하게 된다고 한다.

이씨는 직장동료의 긍정적인 변화를 보면서 보람을 느끼고 있다. 매일 지각을 해 재계약 탈락이 우려됐던 한 동료는 언젠가부터는 지각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 다른 동료는 부모 이외의 다른 사람은 경계를 하기 때문에, 이씨가 먼저 다가가서 악수를 하자고 하면 피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몇 달 후에는 이씨에게 먼저 악수를 청했다고 한다. 그는 동료들이 변하는 모습을 오래 보고 싶다고 했다.

“내가 늦복이 있어요.” 30년 넘게 노동시장에서 소외된 그는 이러한 평범한 직장생활이 오래 지속되기를 바란다. 세상은 이씨의 평범한 삶을 오랫동안 지켜 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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