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승호 전태일을따르는사이버노동대학 대표

정치가 국민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정치를 걱정하고 있다. 부르주아 국가는 애당초 “부르주아계급의 공동사무를 집행하는 위원회”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처럼 부르주아 정치가 서로 협력해서 피지배계급을 다스리는 일을 제치고 그들 간의 권력 쟁탈에 몰두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권력 쟁탈에 몰두하는 ‘막장정치’는 한국만이 아니라 자본주의 패권국가 미국에서도 연출된다. 이런 모습은 왜 나타날까. 자본주의 정치가 더 이상 자신의 토대인 시민사회를 위해 복무할 수 없는 한계점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지금 걱정할 대상은 부르주아 정치가 아니라 그들이 복무할 상전인 부르주아 시민사회다. 우선 경제가 걱정스럽다. 미국 실리콘벨리은행 파산을 한국 경제관료들은 ‘걱정할 일이 아니다’고 낙관론을 펴지만,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는 글로벌 금융공황의 전조다. 지난해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벤 버냉키 전 연방준비제도 의장도 저서 <위기의 징조들>(2021년)에서 “우리는 겸손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나의 결론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한국경제는 금융뿐 아니라 실물도 매우 불안하다. 무엇보다 성장의 기관차 역할을 해 온 수출이 계속 부진하다. 세계 경제의 성장 둔화에다 신냉전으로 중국과의 관계가 악화된 탓이다. 경제가 불안하니 민생이 불안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가 잘 굴러가도 민생은 항상 위태로운데 경제까지 불안하니 민생은 더욱 위태롭다. 이렇게 민생이 위태로우니 정당들은 정쟁에 몰두하면서도 입으로는 모두 민생을 최우선 과제로 삼겠다고 한다. 솔직히 말해 그들이 어쩐다고 파탄난 민생이 나아질 것도 아니다.

민생이 파탄나면서 인구 재생산은 한계점에 이르고 있다. 얼마 전 한국의 출생율이 세계 신기록을 수립했다는 발표가 있었다. 전국 합계출생율은 0.78명이고 서울은 0.59명이다. 신생아 숫자가 급격히 줄고, 문 닫는 초등학교들이 늘고 있다. 나름 전문가들이 진단과 처방을 내린다. 그런데 하나같이 자본주의 체제를 변혁하지 않는 선 안에서만 말한다. 개혁주의자는 육아복지를 확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여성주의자는 성평등을 말한다. 그러나 성차별이 매우 적고 육아를 위한 복지제도가 발달한 프랑스 합계출생율도 2명을 밑돈다. 선진 자본주의 나라 대부분 출생율은 1명대다. 저출생은 한국만이 아니라 현대 자본주의 사회 공통 문제다. 유독 한국 사회복지가 부족하고 성차별이 가장 심각하다고 진단해야 한다. 그 뒤에는 한국의 천민자본주의 파쇼체제가 있다.

요즘 디스토피아 드라마들이 시중의 화제다. 인간성을 파괴하는 학교폭력을 다룬 이야기 <더 글로리>와 특성화고교 학생이 콜센터에서 현장실습 노동을 하다가 자살한 이야기 <다음 소희>다. 이 드라마들이 정치는 물론이고 언론이나 학문보다 더 생생하게 우리 사회현실을 보여준다. 다큐멘터리 <나는 신이다: 신이 배반한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하나같이 강자가 약자에게 절대적으로 군림하는 한국 천민자본주의 사회의 생생한 현장이다. 강자가 약자의 인간성을 파괴하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이런 영상물들이 요즘처럼 관심을 모은 적이 없다. 인간성 파괴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한계에 이르렀다.

한국 사회는 어째서 이렇게 강자가 약자들의 인간성을 파괴하는가. 청소년 인성교육이 부족하거나 사이비종교의 발호 때문일까. 진정한 원인은 우리 사회가 근본적으로 인간성을 파괴하는 자본주의 사회이고, 보다 구체적 층위에서는 천민자본주의 파시즘 체제이기 때문이다. 한국 자본주의가 착취적·억압적일 뿐 아니라 초과착취적이고 파쇼적이 아니라면 유독 한국에서 인간성 파괴가 심각할 까닭이 없다.

국내 최대재벌 총수 이재용을 비롯한 재벌가 2·3세들이 걸핏하면 마약사범으로 적발되는 것도 초과착취적·지대추구적 천민자본주의 체제를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전두환의 손자가 폭로한 특권층의 가족 범죄도 파쇼체제를 빼놓고 이해할 수 없다. 천민자본주의 파시즘 체제가 아니라면 특권층의 비리·비행도 약자들의 인간성 파괴도 이처럼 극심할 수 없다.

사회운동과 노동운동도 걱정거리다. 사회가 병들었으면 사회운동·노동운동은 사회를 혁명하려고 떨쳐나서야 한다. 그러나 그 많던 혁명가는 어디로 갔는지 찾아보기 어렵다. 간혹 “문제는 자본주의고 답은 사회주의다”라면서 사회주의 기치를 치켜드는 사람은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 기치를 드는 분들 가운데 혁명의 깃발을 드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그러면 ‘사회주의 혁명’ 깃발을 들면 될까? 분단 파시즘 체제 아래서 민중이 그 깃발을 향해 쇄도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사회민주주의 개혁’ 기치를 계속 가져갈까? 그것은 실패의 연속일 것이다. 그러면 이른바 ‘좌파’의 시도처럼 이념은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실천은 개혁주의로 나아갈까? 그것은 잘해야 실패한 유로코뮤니즘의 재탕일 것이다.

이스트번 메자로스는 <21세기 사회주의>에서 ‘최소 강령주의’를 비판했다. 사회민주주의와 의회주의로는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최소강령이 곧 개혁주의 강령은 아님을 통찰하지는 못했다. 레닌의 <민주주의 혁명과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과 모택동의 ‘신민주주의론’에서 최소강령은 개혁강령이 아니라 혁명강령이다. 우리의 주·객관 조건에 맞는 혁명주의 최소강령을 정립하고, 투쟁을 통해 최대강령을 실현하자.

전태일을따르는사이버노동대학 대표 (seung7427@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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