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진우 서울과학기술대 교수(안전공학)

지난 7일 ‘사업장 위험성평가에 관한 지침’(고시) 개정안이 행정예고됐다. 그 내용을 보니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속담을 현실에서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하다. 고용노동부가 위험성평가의 원리·개념 등에 대한 기초지식 없이 개정안을 마련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위험성평가를 단지 양적으로 확산해야 한다는 조바심도 크게 작용한 것 같다. 위험성평가를 내실화할 생각은 하지 않고 일상안전활동 수준에 해당하는 것을 위험성평가인 것으로 외피만 바꾸려 하고 있다.

위험성의 개념, 위험성평가의 절차 등을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지 않게 변형하거나 낮추는 것이 노동부가 이해하는 ‘자기규제’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자율이 아닌 방종이다. 방향을 잘못 제시하면서 기업에 위험성평가를 올바로 실시하도록 주문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개선은 어렵지만 개악은 순식간이다. 행정예고안의 문제가 차고 넘치지만 굵직한 몇 가지만 지적하고자 한다.

먼저, 위험성 추정 절차를 생략한 것은 국제기준과 학문적 개념에 배치된다. 위험성평가의 핵심절차인 위험성 추정을 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안전활동의 일종이지 더 이상 위험성평가라 할 수 없다. 위험성 추정이야말로 위험성평가와 다른 안전활동을 차별화하는 핵심 절차이기 때문이다. 국제표준화기구(ISO) 규격인 ISO45001·31000·12100 등 국제기준과 영국을 비롯한 선진국의 지침·규격 모두 위험성평가에 위험성 추정을 포함하고 있다. 노동부는 도대체 어떤 근거로 위험성 추정 절차를 없애려고 하는가. 위험성 추정이 반드시 빈도와 강도를 계량적으로 계산하는 것이라는 생각도 대단히 잘못됐다. 국제기준 어디에서도 위험성 추정을 계량적 방법으로 한정하고 있지 않다.

둘째, 위험성 추정이야말로 노동자 참여가 가장 필요한 절차인데, 이 절차가 빠져 버렸으니 노동자 참여는 허울에 지나지 않게 됐다. 위험성평가가 수박 겉핥기 식으로 이행되지 않도록 하려면 위험성 수준을 정하는 위험성 추정 과정에 해당 작업자들이 참여해 논의하는 것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또 작업자 참여만을 강조한 나머지 위험성을 가장 잘 아는 위치에 있는 감독자의 참여가 빠질 수 있다. 노동자의 ‘형식적’ 참여보다 위험성평가의 ‘정확한’ 실시 장치가 훨씬 더 중요하다.

셋째, 위험성평가의 대표적인 방법으로 체크리스트법, 핵심요인 기술법 같은 정체불명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것도 문제다. 국제기준과 실무 어디에서도 이러한 방법을 위험성평가 절차 전체를 포괄하는 방법이라고 하지 않는다. ‘유해위험요인 도출’ 등 위험성평가의 일부 절차만 커버할 수 있을 뿐 ‘위험성평가’ 방법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위험성평가 방법을 둘러싼 혼란이 가중될 가능성이 크다.

노동부는 위험성평가의 상향평준화를 위해 노력할 생각은 하지 않고 하향평준화하려고 작정한 듯하다. 위험성평가의 부실한 운영 현실에 굴복한 모양새다. 가이드라인에 불과한 지침의 내용을 이렇게 낮추는 것은 기업에 잘못된 위험성평가 방향을 제시하고 그 수준을 높이고자 했던 기업 의지에 찬물을 끼얹는 처사다.

그간 태만히 했던 위험성평가의 실질적 개선노력은 시도조차 하지 않고 있다. 대표적으로 2017년 1월 위험성평가를 무력화하는 ‘황당한’ 지침(위험성평가 미실시를 처벌하지 마라는 내용의 지침)을 여태껏 철회하지 않고 있다. 위험성평가를 활성화하겠다고 하면서 이 잘못된 지침을 철회하지 않는 걸 보면 위험성평가에 과연 진정성이 있는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노동부가 역사적 평가에 대한 감수성 없이 보여주기에 집착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노동자에게 돌아간다. 노동자에 대한 눈속임은 이제 그만둘 때도 됐다.

부디 행정예고안을 전면 재검토하길 바란다. 합리적 손질 없이 행정예고안을 밀어붙인다면 훗날 가혹한 역사적 평가에 직면할 것이다. 잘했다는 평가는 못 받더라도 최소한 망가뜨렸다는 평가는 받지 말아야 할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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