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현기 공인노무사(공공운수노조 법률원)

지금은 독립해 서울에서 살고 있지만 지난달까지 경기도 과천의 아파트에서 살았다. 여전히 부모님이 거주 중인 해당 아파트 단지는,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이 거주 중인 아파트 단지이기도 하다.

노동부 장관과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았다는 자랑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장관 취임 전에도, 그리고 취임 후에도 이정식 장관을 실제로 본 적은 없다. 취임했을 때 단지 내부에 장관 취임을 축하하는 현수막을 보았을 뿐이다. 현수막을 보았을 때도 신기하다는 생각만 들었고,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해당 아파트 단지는 택배 차량이 도착하면 단지 입구에 차량을 주차한 뒤 각 세대로 배송은 끌차를 이용해야 한다. 모든 차량의 주차는 지하에 이뤄지기 때문에 지상 출입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인데, 택배 차량은 전고가 높아 지하 주차장 출입이 어렵다. 이외에도 택배 차량 지상 출입으로 인한 안전사고와 보도블록 손상 등이 우려된다는 이유도 있다고 들었다.

택배 노동자 혹은 택배사와 합의되지 않은 일방적 지상 출입 금지로 인해 택배 노동자는 앞서 말한 대로 끌차를 사용해 배송하고 있다. 차량을 이용해 배송하는 방법에 비하면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노동 강도 역시 높아질 수밖에 없는 방법이다. 지상 출입을 허용하면 간단하게 해결될 문제임에도 여전히 지상 출입은 금지돼 있다. 이미 여러 곳의 아파트에서 지상 출입을 금지하고 있어서 해당 아파트 단지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개인적으로는 택배 노동자의 희생만을 일방적으로 강요한다는 점에서 동의할 수 없다.

개별 입주민 동의 여부와는 무관하게 입주자대표회의는 택배 차량의 지상 출입을 금지했고, 꽤 오랜 기간 택배 차량은 지상으로 진입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최근 전국택배노조는 배송이 이뤄지는 일정 시간만이라도 택배 차량이 출입할 수 있도록 협조 요청을 했다. 아파트입주민대표자회와 협의 결과 ①부분적으로나마 지상 출입을 허용하는 방안과 ②지하에 무인택배함을 설치한 뒤 전동 카트를 이용해 무인택배함에 물품을 보관하는 방안(생물 등의 제품은 집 앞 배송 유지)의 두 가지 방안이 도출됐다. 동대표, 택배 노동자, 택배사 대리점주 3자 모두가 참여해 결정한 내용으로 두 가지 방법 중 주민투표에 의해 선택되는 방안을 따르기로 합의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 주민투표는 합의 내용과 전혀 다르게 진행됐다. 사전에 논의조차 되지 않은 ③택배사에 해당 아파트 단지를 배송 불가 지역으로 설정하도록 요청하는 선택지가 새롭게 추가됐다. 동대표까지 참석해 결정된 합의사항이 주민투표 시행 과정에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바뀌었다. 주민투표 결과 집 앞 배송을 선호하는 경향이 반영된 탓인지 ③배송 불가 지역으로 설정하는 방안이 최다 득표했다. 물품을 보내는 판매자가 택배사를 선택하는 것이고, 대부분 사전에 계약된 택배사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입주민 요청으로 배송 불가 지역을 설정하는 방법이 정말로 실현 가능한 방법인지 모르겠다.

현실성 여부와는 별개로 택배노조와 합의한 사항을 파기하면서까지 독단적으로 결정해야만 하는 일이었는지 되묻고 싶다. 결과적으로 택배노조는 합의되지 않은 선택지를 제외하고, 차순위 득표를 한 방안을 적용하고 있다. 택배 물량이 많은 일부 동에 대해서는 지상으로 출입해 배송하고 있어 배송이 중단되는 불상사는 발생하지 않았다. 노동부 장관의 아파트에서만큼이라도 노조와의 합의사항이 준수되는 모습을 보고 싶다. 현대판 수신제가 치국평천하가 그런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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