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노동공제회는 1922년 7월 이후에는 지방지회들이 활발히 노동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반면, 중앙지도부는 상해자금 건이 문제가 돼 완전히 분열돼 아무런 활동도 하지 못하게 됐다. 이런 상황에서 1922년 10월14일 5회 임시총회에서 윤덕병·신백우파가 조선노동공제회를 해체하고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자들만의 노동단체로서 ‘조선노동연맹회’를 창립할 것을 주장했다. 이에 따라 같은해 10월18일 서울 장사동에 있는 동양염직회사 내의 공우협회 사무소에서 조선노동연맹회 창립총회를 열고 강령·선언·규칙을 통과시켰다.

조선노동연맹회는 사회주의자와 지식인이라고 하는 두 범주가 결합해 ‘사회주의 지식인 노동자들만으로 조직된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주의적 강령을 가진 노동단체’였다. 창립 때의 가맹단체는 10개로 기존 노동공제회의 약 4분의 1에 불과했다. 회원수는 2만명 정도로 노동공제회의 약 3분의 1이었다.

사회주의 노동단체 조선노동연맹회

조선노동연맹회의 강령을 조선노동공제회의 목적과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공제회는 “인권의 자유, 평등과 민족차별의 철폐, 식민지 교육의 지양”처럼 민족주의적 성향을 강조했는데 연맹회 강령에서는 “신사회의 건설”을 1조에 내세워 사회주의적 성격을 현저히 강조했다. 둘째, “노동자의 지식계발, 기술양성 진보”를 강조한 것은 노동공제회와 조선노동동맹이 같은 것으로 보인다. 셋째, 공제회는 “노동자의 노예상태 해방과 상호부조”를 강조해 민족주의적 강령의 성격을 제시하고 있는 데 반해 연맹회의 강령에서는 “계급의식에 의한 일치단결”을 강조해 사회주의적 강령 성격을 뚜렷하게 제시했다.

조선노동연맹회 창립과정에서 나타난 문제는 차금봉을 포함한 노동자파가 노동공제회의 해체에 즉각 격렬하게 반대해 조선노동공제회 고수를 선언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조선노동연맹회 창립을 주도한 윤덕병·신백우 등 사회주의 지식인들은 조선노동공제회의 완전한 해체에 성공하지 못했다. 그래서 1922년 10월18일 이후부터 노동운동계는 조선노동연맹회와 조선노동공제회의 양립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조직형태 측면에서 조선노동연맹회를 평가해 보면, 조선노동연맹회는 소수파로 창립해 소수파로 종결됐으며 조직 확대에 전혀 성공하지 못했다. 1924년 4월20일 통일된 전국적 노농동맹체로서 조선노농총동맹이 설립했다. 그때 조선노농총동맹에 가입함으로써 해체된 조선노동연맹회 가입단체는 5개 단체에 불과했다. 조선노농총동맹에 모두 172개 노동단체가 가입한 것과 비교해 보면 매우 적은 숫자였다.

당시 식민지 상황에서는 일본제국주의와 일제 자본가들이 압박의 주체였으므로 노동운동도 각 파가 연합·대동단결해서 전국적 조직을 만들어, 전체 노동자계급이 단결해서 일제의 압박에 대항해야 하는 것이 우선적인 과제였다. 즉, 식민지적 상황에서의 초기 노동운동은 민족주의 노동단체와의 관계를 끊고 사회주의적 강령을 가진 노동단체들만의 소규모 노동연맹체를 조직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민족주의적 노동단체들과도 연합하고 다른 분파와도 연합해 무엇보다도 전국적 노동연맹체를 유지·발전시키는 것이 더 중요한 과제였다. 결국 반일제 민족해방투쟁에서는 일본제국주의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을 투쟁에 집결시키는 것이 중요하고, 노동세력을 하나로 단결시키는 전국적 노동조직이 필요했다. 조선노동연맹회는 하나의 사회주의적 분파로서 성립됐고 그 조직의 해체 또한 하나의 사회주의적 노동단체로서의 해체에 불과했던 만큼, 그 조직적 한계가 분명했다.

그럼에도 조선노동연맹회가 활동했던 긍정적인 면은 다음과 같다.

첫째, 1923년 경성고무 여자직공 파업에서 조선노동연맹회의 지원활동은 뛰어났다. 이를 포함해 서울지역에서 1922년 12월부터 1923년 7월에 이르는 시기에 전개된 양말과 고무·양복 노동자들의 파업을 지원하고 다수의 노동조합들을 함께 조직함으로써 이 시기 노동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둘째, 조선노동연맹회는 우리나라 최초로 5·1 노동절 행사를 조직했다. 노동절 기념행사는 3·1운동 직후부터 산발적으로 진행돼 왔지만 그것을 기념하는 파업시위와 강연회 등을 광범위하게 조직·지도한 것은 조선노동연맹회에서 시작됐다. 조선노동연맹회는 1923년 5월1일 서울지역 노동자 전체의 휴업을 단행하고 장충단에서 육상경기회를 개최하기로 계획했지만, 일제의 금지로 육상경기회는 열리지 못했다. 하지만 다수의 노동자들이 휴업을 하고 1천500여명의 노동자가 참여하는 강연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노동자들의 일상적 요구 반영

1924년 4월에 결성된 조선노농총동맹은 이 시기 급속하게 보급되고 있었던 사회주의 사상과 노동운동·사회운동에 관심 있는 선진적인 지식인과 노동운동가들의 노력에 영향을 받아 탄생했다.

구체적으로 보면, 조선노농총동맹 결성 움직임은 1923년 9월13일에 전국적 차원의 노농단체를 만들기 위한 준비위원회가 조직되면서 시작된다. 이 준비위는 일본에서 활동하다가 1923년 8월부터 국내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사회주의 사상단체인 북성회(北星會) 계열에서 주도했다.

북성회 계열과, 1921년 1월 창립해 활동하고 있었던 서울청년회 계열이 노동운동 헤게모니 장악을 위한 치열하게 경쟁하던 와중에서 조선노농총동맹은 성립한다.

서울청년회 계열은 1921년 9월28일 20여개 노동단체가 참가한 가운데 조선노농대회준비회를 조직한다. 한편 북성회 계열은 기존의 중앙중심주의를 지양하고 지방분권과 조직을 강화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었다. 그리하여 1924년 3월 초순 전남 광주에서 전라도노농연맹을 조직한 다음 경상도와 전라도 두 연합체의 가맹단체 90여개 출석대표 150여명의 운동가들이 대구에서 모여 남선노농동맹회 창립총회를 개최했다. 이어 전국의 노농단체를 통일한 연합기관 성립에 관한 교섭서를 조선노농대회와 조선노동연맹회 두 단체에게 발송하는 한편, 교섭위원을 서울에 파견하기로 했다.

그리고 북성회계열의 운동가들이 배제된 가운데 서울계의 주도 아래 1924년 4월15일에 서울에서 전조선노농대회가 개최됐다.(이 대회는 전국 83개의 노농단체대표 87명이 참가했다), 이 과정에서 노동단체들은 단순히 사회주의 사상단체 간 헤게모니 경쟁에서 들러리를 서는 것을 지양했다. 그래서 노농단체의 전국적 통일에 대한 대중적 요구가 밑바탕이 돼 전조선노농대회에 참가했던 노동조합의 대표들이 “전 조선의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의 단체는 전국적 총동맹을 조직하자”라는 안건을 가결하게 됐다. 따라서 남선노농동맹회의 대표를 참석시켜 이 대회를 ‘전조선노농총동맹 창립 준비위원회’로 하자는 제안이 통과됐다.

결국 노농대회준비회와 남선노농동맹회 그리고 조선노동연맹회 3개 연합체의 공동노력에 의해 1924년 4월20일에 조선노농총동맹이 창립된 것이다. 3개 연합체에서 가입한 노동단체의 수는 남선노농동맹회가 99개로 가장 많고, 다음이 조선노농대회 54개, 그리고 조선노동연맹회 5개, 기타 무소속이 14개로 모두 172개 단체에 달했다. 조선노농총동맹이 성립한 후 기존의 모든 연맹체는 발전적으로 해체됐다.

조선노농총동맹의 강령은 1. 오인은 노동계급을 해방하고 완전한 신사회를 실현할 것을 목적으로 함 1. 오인은 단체의 위력으로써 최후의 승리를 얻을 때까지 철저하게 자본계급과 투쟁할 것을 기함 1. 오인은 노동계급의 현하(現下) 생활에 비춰 각각 복리증진, 경제향상을 기함을 표방했다.

아울러 조선노농총동맹은 창립대회 이후 곧바로 임시대회를 소집해서 4개 항목의 결의안을 채택하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1. 각 지방에 노동자단체를 조직하고 원조하며 각 지방노동자 상황을 조사할 것

2. 노동운동의 근본정신과 배치되는 이류(異流)단체는 파괴할 것

3. 강습소와 팸플렛 등으로 노동자의 계급의식을 현저히 높일 것

4. 노동과 임금을 최저 1일 1원 이상, 노동시간은 8시간제로 할 것

조선노농총동맹의 강령이나 결의안을 보면 조선노동공제회나 조선노동연맹회보다도 더 노동자들의 일상생활에서의 요구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또 전국의 노동자, 농민단체를 거의 총 망라한 통일적 조직이었다는 점에서 조선노농총동맹의 성립은 조선노동운동의 커다란 진전이었다. 당시 총동맹에 가입한 세포단체는 260여개소, 회원총수는 5만3천명이었다고 한다.

주요 노동자 파업 주도
민족·계급 과제 동시 제기 못해

조선노농총동맹의 활동 양상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노농총동맹이 직접 지도해 해결한 파업 사례들로 1924년 9월 초 서울에서 일어난 용산제등고무공장 노동자 200명의 파업, 1925년 2월에 경성 대동인쇄 주식회사 노동자 150여명의 파업, 그리고 1925년 1월부터 3월에 걸친 경성전기회사 500여명의 파업이 있다.

둘째, 조선노농총동맹이 분리된 1927년 이후 전국에서 발생한 노동쟁의는 1만5천여건으로 전해인 1926년의 6천건에 비해 그 숫자가 2배 이상을 기록했는데, 이는 조선노동총동맹의 직·간접적인 영향하에 파업이 전개됐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조선노농총동맹은 몇 가지 한계점도 있었다.

첫째, 식민지의 기본과제인 민족문제의 해결과 계급문제를 동시에 해결하는 민족해방의 과업을 제기하지 못함으로써 반제반봉건혁명의 객관적 요구를 명확히 반영하지 못했다.

둘째, 노동단체와 농민단체의 연합체로 형성돼 사회혁명에서 다른 계급과 구분되는 프롤레타리아의 선도적 역할을 명확히 인식하지 못했다.

셋째, 일제의 가혹한 탄압 속에서 활동의 자유를 구속당하고 있었지만 활동의 합법성을 쟁취하기 위한 실천적인 강력한 투쟁을 조직하지 못했다.

노동법 박사 (laborkyu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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