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건준 아유 대표

어쩌다 너는 ‘꼴수’ 나는 퇴보

예상 못 한 인연들이 만나면 다양한 얘기들이 튀어나온다. 정부를 반노동 꼴보수로 보는 사람, 그나마 깡패 같은 이 포퓰리즘을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것으로 보는 사람, 낭만검객이 거칠게 휘두르는 정부로 보는 사람 등 다양하다. 각자의 초점은 다르지만 일치하는 것은 이런 나라 꼴을 벗어나기 바란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진보와 보수를 넘어서는 곳에 진일보가 있다며 오염된 표현인 ‘중간’도 ‘중도’도 아닌 ‘중원’을 열자고 한다. 어떤 이는 지금 필요한 것에 미달한 상태를 한탄하며 한미일 동맹을 강화하되 한일 핵무장을 저지하는 외교의 현대화, 제왕적 대통령제를 바꾸는 정부체제의 현대화, 청년과 미래를 위한 투자로서 연금개혁 등 복지의 현대화를 주장한다. 우리 모두 변화된 현실에 맞는 적절한 사회를 찾고 있다.

러-중-북으로 이어진 사회주의 국가가 진보로 보이던 20세기가 있었다. 지금 러시아는 이상한 자본주의가 됐으며 중국은 1인 권력체제로 굳어지고, 이북은 봉건적 권력 세습으로 핵을 쥔 꼴통국가로 취급된다. 이런 상황에서 반미동맹이 인류의 비전인가. 그렇다고 냉전시대에 작동하던 한미일 동맹 안에서 새로운 국제질서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을까.

반미구국동맹을 빠져나오지 못한 진보는 퇴보다. 아직도 우크라이나 전쟁이나 외교분쟁을 이런 시각으로 분석하는 사람들이 꽤 있고 심지어 민주노총의 어떤 토론회에서는 이런 시각이 주류처럼 활개 친다. 친미구국동맹을 벗어나지 못한 보수는 ‘꼴수’다. 그들의 집회에는 성조기와 태극기가 떨어지면 세상이 망할 것처럼 나부낀다. 세계는 변했고 과거와 같은 프레임은 대결과 위기를 격화할 뿐이다.

새로운 맥락을 위한 상상

왜 하필 한국의 보수는 이승만 같은 사람들을 치켜세울까, 조폭 같은 사람들을 계보로 여기면 조폭과 유사한 행태를 보일 수밖에 없다. 그래도 사상이라고 할 것이 좀 있던 김성수나 진보적인 조봉암 같은 사람들이 그 시대에 만나서 얘기하고 공조했다면 한반도는 정적 암살과 전쟁으로 치닫지 않고 달라졌을까. 청년 정치를 한다면서 여성을 공격해 대는 반페미 저급 정치가 아니라 깊이를 가진 보수와 유연한 좌파가 만나 새로 열어 가는 세계를 상상할 수도 있다.

어떤 우파는 이승만에서, 어떤 보수는 김구에서, 어떤 좌파는 소비에트혁명에서, 어떤 좌파는 민족해방운동에서, 또 다른 진보는 유럽의 복지국가에서 족보를 만들어 왔다. 각자 정통성을 찾기 위한 역사투쟁에 몰입하면 새로운 공동체를 위한 협력이 가능할까. 뉴라이트가 등장할 때 역사투쟁을 했다. 역사를 돌이켜 족보를 통해 자기 정당성을 찾는 것이다. 자기 족보를 벗어나면 배제하면서 새 공동체를 이룰 수 있을까.

우리는 개인으로서 체험하고, 집단으로서 공동 경험을 가지며, 그런 경험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역사적 계보를 만든다. 그러나 계보를 만드는 것보다 현재 공동체 구성원의 다양한 측면을 통섭해 사회적 맥락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역사투쟁이나 맥락형성이나 그게 그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지난 역사를 둘러싼 평가투쟁과 지금의 사회적 맥락을 만드는 것이 꼭 동일한 것은 아니다.

역사투쟁은 사상투쟁의 한 방법이다. 사상을 앞세우는 것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근대에 분리된 이성을 앞세운 계몽주의의 유산이자 공부에 일가견이 있는 인텔리에게 익숙하다. 대부분은 사상이나 이념을 앞세우지 않는다. 머리와 팔다리가 따로 아닌 몸과 통으로 산다. 뭔가를 바꾸려면 일부분이 아니라 모든 감각을 가동해 사람들의 행위를 통으로 느껴야 한다. 사상보다 문화에서부터 출발해야 할지도 모른다.

뜨악한 586노인독재

시장질서에 맡기면 개인들은 자유를 얻을 것처럼 왜곡된 자유주의는 오래된 것이고 하나도 아니다. 그와 달리 마르크스가 말한 노동계급 이익은 착취와 수탈을 낳은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라, 인간들의 관계라는 ‘보이는 손’으로 보편적 질서를 만들려는 발상이었다. 그러나 노동계급 이익은 일부의 이익으로 쪼그라들었다. 민주노총은 누구나 환영할 보편적 실체인가.

대규모로 모여서 확연히 드러나던 노동이 단결하면 강력했던 시절은 가고 흩어져 드러나지 않는 요즘 노동은 연결이 쉽지 않다. 지금은 기성노조 안에서 아무리 급진적 주장을 해도 결국 과거 노동계급에 대한 향수를 벗어날 수 없다. 새 연결 방법을 찾아 노동의 물결을 이루지 못하면 ‘보이지 않는 손’이 지배할 것이다.

한때 노동에 주목했던 40대 입에서 나온 “586노인독재”라는 표현을 듣고 뜨악했다. 586 이전 세대인 70대 노인은 빈곤하고, 586 바로 아래 X세대는 586과 연합해 있으니 문제는 그들 이후 세대라는 것이다. 지금은 586이 주류인데 이들이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을 고집하는 등 기득권을 쥐고 있다. 부의 대부분이 586세대에 있다. 이런 세대가 기득권을 가지고 은퇴 후에도 고집부리면 그것이 ‘586노인독재’라는 것이다.

‘꼰대’라는 말이 일상용어이자 사회적 문제를 표현하는 용어가 됐지만, 그것에 구조적 문제를 무겁게 얹어 극단화한 것이 ‘586노인독재’라는 용어다. 이 대목에서 세대론을 따질 것은 아니다. 세대 내 빈부격차도 있다는 것을 안다. 중요한 것은 하고 싶은 얘기의 맥락이다. 자선가가 아니라 사회를 바꾸는 활동가나 혁신적 정치가가 필요한 때에 무슨 ‘어른 김장하’를 들먹이냐는 사람도 있지만, 진정 필요한 것은 원초적 욕망만 남은 노인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성숙한 인격을 가진 어른이다.

그래서 어쩔 건데

미래사회 중심으로 진입할 세대는 어떤 사회적 맥락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기후위기에서 기성세대가 누릴 것 다 누리고 탄소를 뿜어 미래를 소비해 버려 미래를 살아갈 젊은이들에게는 심각하다. 기성세대는 “우리가 너희들 키우려고 뼈 빠지게 일했는데, 너희들이 갑자기 우리에게 삿대질을 해?”라는 식으로 대하는 모습도 보인다. 살날 얼마 남지 않는 세대는 어차피 뒤질 것이니 신경 안 써도 되고, 살날 많은 세대는 심각하게 걱정해야 하는가.

연금개혁에서도 유사한 논쟁 구도가 생긴다. 연금이라는 한 분야의 정책 문제가 아니다. 퇴직 후에 소득대체율을 유지하거나 높이려는 사람들이 미래세대 부담을 덜어 주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연금개혁은 불가능한 일이다. 확산된 자기이익 중심의 사고는 세대에 파고들어 공동체감각을 밀어내고 세대이기주의가 된다. 가진 자가 성찰하지 못하면 없는 자가 늘어난다. 기성세대가 스스로를 성찰하지 못하면 젊은 세대는 힘겹다. 권리를 누리는 노조가 성찰하지 못하면 무권리 노동자는 아프다.

우리 사회는 도대체 잘 하지 못하는 이놈의 성찰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성찰을 기다리면 나무에서 감 떨어지기를 바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것이 정치든, 노동이든, 세대든. 어떤 분야든 세대를 넘어 새로운 비전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이것이 문제다. 상호작용을 통해 집단적 주체가 되지 않는다면 허망한 꿈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고상한 토론회에서든, 뒷골목 술자리에서든 갑론을박 중이다.

아유 대표 (jogju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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