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호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소설가 장강명이 <소설가라는 이상한 직업>이란 에세이집을 신생 출판사 ‘유유히’에서 냈다. 원래 이 책은 미디어창비(창작과비평 자회사)가 출판하려고 했다가 우여곡절 끝에 이렇게 세상에 나왔다.

장 작가는 이 책에서 “신경숙의 표절을 창비가 궤변으로 옹호하며 표절 기준을 무너뜨리려 한 것에 대해 한국작가회의는 끝내 아무 논평도 내지 않았다”고 썼다. 이 문장은 장 작가가 지난해 웹진 ‘채널예스’ 6월호에 이미 썼다. 그럼에도 창비는 미디어창비에서 출판작업을 할 당시 이 문장에 들어 있는 ‘궤변’을 ‘나름의 논리’로 바꾸고 괄호에 ‘이 의견과 창비 뜻은 다르다는 것을 밝혀 둔다’는 문장도 추가해 달라고 했다.

장 작가는 창비의 요구가 정상적인 문장 수정 의견이 아니었다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미디어창비 출신인 ‘유유히’의 이지은 편집자도 최근 워크스페이스 ‘노션’에 ‘편집자로서 참 이상한 일을 겪었습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이씨는 이 문장을 두고 창비 윗선들이 회의를 열어 지난해 9월1일 ‘궤변’을 순화하고 ‘창비 입장과 다르다’는 문구를 넣도록 하라고 지시했다고 했다. 이씨는 “지난해 9월25일엔 창비 이름으로 된 플랫폼에 장강명 책을 홍보하지 말라는 마케팅부장의 지시가 있었다”고도 썼다.

이 지경에 이르러 작가는 창비에서 책 내는 걸 접었다. 몸담은 직장이, 그것도 이름깨나 알려진 창비에 배신당한 편집자 이씨는 1인 출판사 ‘유유히’를 차려 작가와 의기투합해 출간을 밀어붙였다.

이에 창비는 경향신문에 “통상 저자와 이야기를 나눈 것이다. 저자 문장을 그대로 싣기로 했다. 책이 나오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다”고 해명했다.(경향신문 2023년 1월5일 17면) 하지만 경향신문 기사만으론 창비가 ‘궤변’까지 살리고, ‘창비 입장과 다르다’는 문구마저 안 넣기로 한 건지 명확하지 않다. 창비의 후속 입장을 기다려 본다.

암울했던 군사정권 때 창비는 숱한 문학청년들의 가슴을 적시는 샘물이었다. 우리 역사에서 문학이 최고조에 달했던 1980년대부터 은밀하고 조용하게 ‘창비 권력’이란 단어가 새어 나왔다. 최초의 정권 교체가 이뤄진 90년대 후반부턴 더 큰 우려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졌지만 창비도,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급기야 2004년엔 사이비 진보가 문단을 독점하면서 내외부 어디서도 비판받지 않는 성역이 돼 버린 문학권력의 부끄러운 치부를 들춘 <한국 문학권력의 계보>라는 책도 나왔다. 군사정권과 싸우느라 놓쳤던 문학권력 내부의 모순은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면서 드러났다. 이 책은 권력화된 문단, 주례사 비평, 끼리끼리 나눠 먹는 문학상, 실력보다는 인맥으로 끌어 주고 밀어 주는 문학계의 부실 규모를 파악해 준 일종의 조사보고서였다.

이번에도 문단은 위험 신호를 무시했다. 그 결과 고은과 신경숙 사태로 폭발하면서 이제는 사재기 아니면 아무도 책을 읽지 않는다. 이제 문학은 깜깜한 세상을 선도하는 명징한 표상은커녕 혐오와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돼 버렸다. 썩은 고름을 짜지 못한 문단 내부가 이를 앞당겼다.

문학과 가장 가까이 붙어사는 언론의 책임도 크다. 경향신문은 올들어 1월5일 17면과 1월14일 17면, 2월15일 20면에 걸쳐 장강명 작가와 창비의 갈등을 3번이나 보도했다. 하지만 한겨레는 1월5일 20면에 한 번 보도하고 말았다. 잘 아는 이들의 치부를 들추는 게 불편하겠지만 언론이 더 용기 있게 써야만 문학이 살아난다. 계속 눈감다 보면 한겨레 스스로도 문학권력의 한 축이 되고 만다.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leejh6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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