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다혜 변호사(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금속노조 법률원)

지난 9일 태안화력발전소 중대재해 항소심 선고를 돌이켜 보면, 재판부가 법정에 들어서고 1분이 채 지나기 전에 불안감이 엄습했던 것 같다. “선고에 앞서, 고인의 명복을 빌며 유족에게 위로의 말씀을 전한다”는 첫 문장에 이어 “피고인들도 긴 시간 수사와 재판받느라 고생하셨다”는 문장이 들렸기 때문이다. 귀를 의심했다. 기업의 안전범죄로 피해자가 목숨을 잃은 것과, 이를 야기한 피고인들이 죄를 덜기 위해 방어권 행사를 하느라 애쓴 것을 나란히 두고 함께 논할 수 있는 막된 언어. 거짓 등가성의 오류라는 지적까지 갈 것도 없다. 본격적인 선고 전에 재판을 진행한 판사의 감상 내지 소회를 밝힌 것일 텐데, 어쩌면 이는 116페이지에 달하는 판결의 예고편과도 같다.

구체적 쟁점과 법리 등에 대한 평가는 판례 평석에 미뤄두고, 이 판결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중대재해를 바라보는 법원의 인식에 대해 짧게 남기려고 한다. 먼저 항소심은 원청인 한국서부발전과 소속 임직원들에 대한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행위를 모두 무죄로 판단하면서 기업범죄로서 원청의 책임을 일체 부정했다. 법원은 원청이 피해자 김용균과 같은 하청노동자들의 개별 업무수행에 구체적으로 지시·감독한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하청노동자들의 취급 설비 및 작업환경을 모두 원청이 지배·관리하고 하청의 인력운영도 원청이 사실상 결정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이를 모두 계약의 특수성의 문제라 선을 그은 채 원청과 하청노동자 간의 실질적 고용관계를 부인했다. 대법원은 산업안전보건법의 보호대상을 사업주와 고용관계에 있는 소속 노동자로 한정하는 경우 야기되는 불합리한 처벌의 공백을 보완하기 위해 ‘실질적 고용관계’라는 개념을 들고 있다. 이는 근로의 실질에 있어 노동자가 종속적인 관계에서 근로를 제공하는 것이라면 해당 사업주의 재해방지 의무의 보호대상이 된다는 취지다. 법원은 공공기관인 서부발전의 산업안전보건법상 보호대상에 김용균과 같은 하청노동자가 포함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이다.

문제는 설비 방호조치나 점검 업무시 2인1조 조치와 같이 이 사건에서 쟁점이 된 각 안전조치는 발전소의 설비 변경이나 용역계약 내용 결정 등을 할 수 있는 권한과 능력이 있는 원청만이 이행할 수 있는 의무라는 점이다. 항소심 법원이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죄책을 인정한 피고인은 한국발전기술과 소속 태안사업소장뿐이다. 사실상 권한이 없는 하청업체 소속의, 대표이사도 아닌 일개 사업소장이 원청에 관련 조치 요청을 하지 않은 잘못이 이 사건에서 지적되는 유일한 산업안전보건법상 의무 위반이 된다.

1심과 비교하더라도 항소심 법원은 어느 정도 규모가 되는 기업의 대표자나 임원에게 산업안전보건법상 의무위반의 행위자성은 물론이고 업무상 주의의무를 부담하는 주체로 인정할 수 없다는 강력한 의사를 표하는 듯하다. 원청 대표이사와 발전본부장이 과거 협착사고 등 다수의 안전사고 발생과 관련 조치를 보고받거나 직접 수행한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김용균이 사망한 설비인 컨베이어벨트에서 동일한 작업방식으로 일하다 협착이 발생한 것이 아닌 이상 이 사건 설비나 작업방식의 위험성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 수 없었다고 봤다. 심지어 과거 컨베이어벨트 협착사고가 있었더라도 취임 전에 발생한 것은 대표이사가 알았다고 볼 수 없고, 이 사건 설비를 직접 방문한 적은 있지만 안전점검을 목적으로 간 것은 아니므로 위험성 등에 대해 발전본부장이 알 수 없었다고 판단했다. 항소심 판단에 따르면 대표이사나 발전본부장 정도의 지위에서는 재임 기간 중 일단 한 번의 사고가 발생한 후 동일한 설비에서 동일한 원인의 사고가 또 발생해야 비로소 두 번째 사고의 의무위반이 인정된다는 해괴한 결론에 이른다. 게다가 원청 대표이사는 발전본부장에게 안전보건관리를 위임했다는 이유 등을 들며 책임을 부인하면서, 정작 발전본부장은 산업안전보건법상 안전보건관리책임자인또 태안발전본부의 규모, 협력업체 노동자를 포함한 노동자수, 업무분장 등을 이유로 이 역시 주의의무를 부인했다.

‘윗선 불패’의 경향은 하청업체에 대한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죄 판단에서도 이어진다. 앞서 본 촘촘한 ‘동종 사고’ 요건의 관문을 통과해도 마찬가지다. 하청 대표이사는 재임 중에 이 사건과 동종의 설비인 컨베이어벨트 아이들러에서 동종의 협착사고를 경험했고 해당 사건 산업재해조사표에 직접 날인까지 하는 등 관련 위험성을 충분히 인지할 수 있는 상황이 인정되는데도 여전히 운전원들의 작업방식의 내용이나 위험성에 대한 인식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끝으로 항소심 판결이 형량에 있어 차별성을 보이는 부분은 낮은 형량만이 아니다. 1심에서 유죄가 인정된 피고인들 개인에게 최대 200시간까지 부과됐던 사회봉사명령이 항소심에서 모두 사라졌다. 사회봉사명령은 유죄가 인정된 자에게 자신의 행위로 인해 손해를 입은 사회에 유익한 봉사활동을 하도록 하는 형사제재적 제도다. 해당 행위로 인해 사회와 구성원들에게 손해를 끼친 경우 봉사를 통해 속죄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항소심은 이 사건이 피고인들 중 누구 한 명의 결정적인 과오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각자의 의무를 태만히 한 결과가 서로 경합·중첩돼 중대한 결과에 이르게 된 것으로 개개인의 과실 정도가 매우 중하다고 할 수 없다는 양형이유를 밝혔다. 여기서 우리는 항소심 법원이 피고인들에게 사회봉사명령을 부과할 수 없었던 이유를 쉽게 짐작한다. 법원은 이 사건을 개인범죄화하며 기업범죄로서 인정 범위를 적극 축소하지만, 동시에 개인들의 잘못이 사회에 해를 끼친 범죄라고도 보지 않는다.

범죄에 대한 제재로서 형벌은 그 범죄에 대한 사회의 비난을 표현할 것을 요하고, 이미 범죄를 저지른 자와 아직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자 모두에 대한 범죄억제력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이번에도 법원은 날마다 발생하는 안전범죄의 중대함에 공감하거나 일터의 실체를 규율하지 못했고, 범죄를 예방하는 데도 철저히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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