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명교 플랫폼C 활동가

민주노총은 4월 대의원대회를 한 차례 더 열어 2024년 총선방침을 확정할 예정이다. 총선방침 초안(총선안)이 내리고 있는 주요한 상황 진단에는 기성정치의 현 상황에 대한 암울한 인식과 노동조합의 절박함도 있지만, 내부적으로는 “선거 대응에서의 각자도생”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면서 “민주노총이 책임지고 총선방침 수립을 통해 진보정당, 제 민주·민중세력과 함께 진보정치의 희망을 만들자”고 역설하고 있다. 이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여러 악조건과 암울한 예상을 모두 건너뛴 것인데, 총선안은 이런 공백을 보다 면밀한 분석과 대안보다는 의지주의로 덮고 있다.

총선안은 총 4개의 전술을 제시하고 있는데, ① 비례대표 후보 제외 지역 후보만의 단일화 ② 단일 진보정당 창당 ③ 비례 위성 연합정당 ④ 노동중심의 진보대연합이다.

첫 번째로 제시한 지역후보 단일화는 복수의 진보정당 시대가 도래한 이후 이미 추진해 왔던 방안이기 때문에 별로 덧붙일 말이 없다. 총선안이 서술하고 있듯, 이 전술은 이미 그 자체로 한계를 노출해 왔고, 지역후보를 단일화할 때에도 매번 적지 않은 갈등상이 있었다. 이는 비단 총선안이 단점으로 지적하는 바와 같이 “집중 투표 조직에 한계가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두 번째로 제출한 내년 총선 전 단일 진보정당 건설은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가능하지도 않다. 이것이 불가능한 이유는 총선안이 밝히듯 단지 “정치위원회 내에서 이견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이에 존재해야 할 많은 중간 단계를 생략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초공사부터 골조, 외장 등 무엇 하나도 된 게 없는데 어떻게 갑자기 지붕을 쌓자는 것인지 모르겠다.

비례 위성 연합정당 방안과 기존 진보정당을 그대로 유지한 상태에서의 진보대연합 정당 건설은 ‘총선안’이 유력하게 상정하고 있는 대안으로 보인다. 앞의 1~2안은 이 3~4안을 위한 구색 맞추기일 것이다. 한데 3~4안은 상당히 많은 단계를 건너뛰고 있다는 점에서, 다분히 기술적인 방안에 치중돼 있다는 점에서 상층부의 망상에 그칠 공산이 크다.

무엇보다 ‘비례 위성 연합정당 건설안’은 현실의 조건을 경시한다. 보수 양당의 위성정당을 비판해 놓고 민주노총이 이를 주도하는 게 당위성이 없다는 점은 논외로 하자. 진보정당들에 대한 지지율이 현저하게 하락한 상황에서 비례후보 순번에 대한 합의는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렵다. 정의당에선 비례대표로 인한 당선 가능성이 전대 선거보다 줄어든 상황에서 자당 후보가 아닌 후보를 상위 순번으로 내세우는 것은 예수나 부처가 재림해야 가능하다. 가뜩이나 최근 정의당 내 정치인들이나 당원들 사이에는 진보정당운동의 대의에 대한 동의 지반이 옅어졌고, 오늘날의 진보정당이 노동자민중의 정치세력화 프로젝트의 결과라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합의도 희미해졌다. 옳고 그른 것의 문제를 넘어, 이를 극복하려면 새로운 정치 비전을 제시하고, 이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동의 지반을 조직하기 위한 ‘과정’이 필수적이다.

네 번째로 제시된 ‘노동중심의 진보대연합 정당’ 방안은 기존의 정당들은 그대로 두고, 선거 시기에 별도의 당을 만들어 지역 후보와 비례 후보 모두 동일 정당의 후보로 선출해 대응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비례 위성 연합정당 방안에서처럼 현존하는 입장 차이 문제를 우회할 수 없다. 이를 극복하려면 진보정당들이 맞닥뜨린 정치적 비전에 대한 차이와 해묵은 갈등을 좁힐 수 있는 지난한 토론과 공동 실천의 경험이 필요하다. 총선안은 이를 모두 건너뛰고, 별 설득력 없이 장밋빛 미래를 그리고 있다.

나는 결코 하나의 진보정당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용 없는 기술적 논의, 성찰 없는 의지주의로 점철된 방안을 섣부르게 밀어붙일 때 불러올 더 나쁜 결과를 우려하는 것이다. 민주노총 조합원들과 진보정당 당원들도 무엇이 진지하고 솔직한 계획인지, 무엇이 헛물만 켜는 계획인지 안다. 총선안은 10만명의 노동자 정치세력화 운동 추진위원을 모집해 현장에서 정치교육과 실천 활동을 펼치고, 정치세력화 선언 운동과 정치개혁 운동 등을 전개하겠다고 제안하고 있는데, 이런 실천이 몇 개월 만에 엄청난 성과를 이룰 수 있으리라 자신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1기 정치세력화’가 왜 실패로 귀결됐는지, 이토록 분열된 상황에서도 다시 정치세력화를 추진하고, 여러 차이에도 (단순히 선거에서 집중 투표가 불가능하기 때문이 아니라) 왜 단결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 조합원들과 진보정당 지지자들에게 있는 그대로 설명하고, 직접 고민할 수 있도록 하는 구체적 과정이 필요하다.

많은 논자들이 한 시대가 끝났다고 선언하고, 이제 새 시대가 시작돼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하지만 옛것을 종식시키고 새것을 맞이하는 것은 ‘옛것’의 실체가 무엇인지 인식해야 가능하다. 옛것이 끝났다는 선언은 누구나 가능하지만, 계속 같은 과오를 반복한다면 ‘앙시앙 레짐’은 좀비처럼 지속될 수밖에 없다.

지난 선거들에서 진보정당들이 부침을 겪은 원인을 단지 “분열했기 때문”으로 결론 내리긴 어렵다. 역사적으로 중첩된 모순과 조직 민주주의 및 리더십의 붕괴, 이념의 부재 등 다양한 시공간의 모순들이 복잡하게 뒤얽혀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모순들이 중첩돼 이뤄진 분열은 모순의 결과일 따름이다.

25년 전 IMF 외환위기는 한국 지배계급의 부패와 무능, 제도정치의 부조리와 비합리, 비효율 등 실체를 드러냈다. 대중은 외환위기의 주범을 되물었고, 사회운동은 이에 대한 일관되고 구체적인 답을 제시해야 했다. 그러나 사회운동은 외환위기를 경과하며 되려 김대중 정부의 탄압에 휘둘렸고, 노동유연화 전략으로 인해 위기도 심화됐다. 노동운동은 이에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전략을 구성하는 데 실패했다.

복수의 진보정당 시대에 민주노총은 배타적 지지방침을 기술적으로는 관철시켰지만, 현장 조합원들에 기반한 실질적인 정치 운동은 펼치지 못했다. 정치세력화에 대한 조합원 교육은 거의 부재한데, 이는 민주노총 자신의 정치세력화의 내용적인 비전이 부재한 것에서 기인한다. 민주노조운동이 경제투쟁에만 머무르는 상태로 고착되지 않으려면 단지 사회운동 의제들에 적극성을 보이는 것을 넘어, ‘정치 문제’에 대한 갱신된 자기 전망을 수립해야 한다. 이는 비단 진보정당 통합이나 노동자정당 건설 같은 피상적이고 구호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목표가 아니라, 당면한 현실에 기반한 것이 돼야 한다. 마구잡이로 위성정당 같은 아이디어를 밀어붙인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옛것을 성찰 없이 반복하자는 이번 총선안은 너무 많은 것을 결여하고 있다.

플랫폼C 활동가 (myungkyo.ho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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