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호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나는 우연히 2013년과 2015년 두 교수의 정년퇴임 고별 강의를 들었다. 직함만 100개가 넘는다는 민중예술계 마당발 채희완 교수는 2013년 6월18일 오후 부산대 효원산학협동관에서 ‘예인의 길, 미완성의 미학’이란 이름으로 마지막 강의를 했다. 꼬장꼬장한 선비였던 강내희 교수는 2015년 12월9일 오전 중앙대 서라벌홀 511호 강의실에서 ‘노동 거부와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란 이름으로 고별 강의를 했다.

채희완 교수는 민중예술가답게 “저는 낮에는 말하자면 강단에 서서 서생 노릇을 하고, 밤에는 밤무대에 가서 뛰곤 했습니다. 먹물과 딴따라를 같이 한 셈”이라고 얘기를 꺼냈다. 채 교수 뒤엔 ‘예인’ ‘미학’ 같은 고상한 말이 들어간 펼침막이 섰지만, 정작 채 교수는 강의 내내 ‘딴따라’와 두주불사의 ‘술꾼’ 얘기만 했다. 가령 “(공연 후) 뒤풀이하다 보면 몸이 망가집니다. 수명이 짧아지는 대신에 몸은 깊어집니다”며 술 예찬을 늘어놨다.

반면 강내희 교수는 영문학자답게 ‘노동’의 사전적 의미가 “짐을 지고 비틀거린다”는 뜻이고 프랑스 말에는 ‘고문’이란 뜻도 있다고 했다. “프랑스 민중은 1848년 혁명에 승리한 뒤에 당연히 쓸어 버려야 할 ‘노동’을 그대로 둔 채 거꾸로 ‘노동할 권리’를 주장했는데, 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가” 하고 일갈했던 폴 라파르그의 말을 인용하며 ‘노동 거부’를 목표로 한 노동시간단축을 역설했다.

채 교수의 마지막 강의실은 공연 무대 위 광대를 극장식 의자에 앉은 관객이 지켜보는 형태였다. 예술가의 삶 그대로였다. 하지만 강 교수 강의실은 강단과 학생 의자 사이에 어떤 높낮이 차이도 없는 60명 남짓 들어갈 평범한 직사각형 강의실이었다. 강 교수는 준비한 파워포인트 자료를 넘겨 가며 정확히 45분의 강연을 마쳤다. 의자를 꽉 채운 강의실에 30여명은 선 채로 들었다. 평소 수업과 같았다.

반면 채 교수 강의는 걸쭉한 그의 입담에 걸맞았다. 채 교수 강의엔 자기 다짐이 많았다. 대학 와서 처음 접한 탈춤에서 느낀 충격을 이후 40년 동안 이어 왔는데 앞으로도 계속 탈춤 같은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다.

채 교수는 지금도 그 다짐대로 산다. 채 교수가 이달 10일 서울 한국문화의 집 코우스에서 노래와 춤, 탈, 마당극 <수주탈춤예수전>의 총연출을 맡아 무대에 올린다. ‘수주’는 고 박형규 목사 호다. 채 교수는 1973년 박 목사가 사목하던 서울제일교회 본당에서 마당극 <청산별곡> 안무를 맡아 공연했다. 채 교수는 공연장을 못 구한 젊은 예술가에게 교회 본당을 내준 박 목사에게서 ‘살아 있는 예수’를 봤다.(한겨레 2월7일 23면)

50년을 한결같은 채 교수를 내게 알려준 이는 나의 사촌 형수 조기숙 이화여대 교수다. 1989년 봄 신혼의 형수는 내게 부산 내려가면 채희완 선배 한번 만나 보라고 했다. 채 교수가 부산대에 막 터를 잡았을 때다.

1989년에 만난 채 교수를 다시 만난 건 2011년 10월9일 일요일 아침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 앞이었다. 전날 부산역에 모인 한진중공업 희망버스 5차 마지막 탑승객들은 토요일 오후부터 일요일 새벽까지 밤새도록 경찰의 봉쇄에 막혀 영도로 들어가지 못한 채 부산역과 중앙동, 남포동, 자갈치 일대를 배회했다. 날이 밝아 일요일 아침, 억울해서 해산 못 하겠다는 소수의 참가자가 9일 아침 영도로 들어갔다. 85호 크레인 아래 모인 20여 참가자를 경찰 수백명이 둘러쌌다. 음향장비를 내리고 크레인과 막 소통하려는 순간, 누가 내 팔을 끌어당겼다. 채 교수였다. “어이~ 해장술이나 한잔 하라”며 종이컵 가득 소주를 따랐다. 모두들 체포를 각오한 절박한 순간에 그런 여유는 어디서 나올까.

70대 중반의 늙은 예술가는 아직도 현장에서 팔팔하게 뛰는데, 그를 소개해 준 후배는 K발레의 미학적 토대를 구축한 안무자라는 화려한 미사여구에 갇힌 채 가끔 일간지 문화면에 머리를 내밀고 늙어 간다.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leejh6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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