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같은 금액일지라도 사람의 환경에 따라 가치가 달라진다. 1970년, 월급 2만3천원 받던 4년차 재단사 전태일 열사에게 30원은 하루 차비였다. 하지만 월급 1천800원 받아 대부분 고향집에 부쳐 끼니를 거르는 시다(여공)들에겐 1원짜리 풀빵을 30개나 사먹을 수 있는 돈이었다. 전태일 열사는 풀빵 30개를 산 뒤 여공 6명에게 나눠 줬다.

상대적으로 여유 있는 노동자가 그렇지 못한 노동자에게 손을 내미는 ‘풀빵 정신’은 양극화가 심각해지는 요즘 더 부각된다. 노동공제연합 풀빵이 최근 ‘풀빵금고’라는 이름으로 소액대출사업을 시작했다. 당장 급전이 필요해도 제도권 금융에 접근하기 어려운 저임금·불안정 노동자들에게 신용상태 확인 없이 150만원을 빌려주는 사업이다. 재원 마련 방법은 개인이나 단체가 십시일반 참여하는 ‘풀빵금고지기’다. 3년 약정 계좌에 100만원을 넣는 방식이다. 원금은 돌려주지만 이자는 없다.

<매일노동뉴스>가 지난 2일 서울 종로구 전태일·이소선장학재단 사무실에서 이수호(75·사진) 노동공제연합 풀빵 상임이사장을 만나 소액대출사업이 필요한 이유를 들었다. 이수호 이사장은 전교조·민주노총 위원장 출신으로 전태일재단 이사장과 초대 전태일기념관장을 역임했다.

“불안정·저임금 노동자에게 저리·신속 소액대출”

- 지난해 창립 1주년 행사 때 150만원 한도의 소액대출 사업을 실시하겠다고 했다. 어떤 사업인지 소개해 달라.
“어렵게 사시는 분들이 갑자기 돈이 필요할 경우 낮은 금리로 빠르게 대출해 주는 사업이다. 우리는 공제 연합이기에 단체 회원이나 조합원들이 대상인데, 그 단체들을 믿고 낮은 금리로 150만원까지 융자해 준다. 빠르게, 저리로, 신용을 따지지 않고 대출해 주는 게 시중은행들과 차이다.”

노동공제연합 풀빵에서 제공하는 소액대출 상품은 연 3% 금리로 최대 10개월 원리금 균등분할 상환방식으로 설계돼 있다. 150만원을 대출받을 경우 대출 다음달부터 15만2천70원씩 10개월을 상환하면 된다. 시중은행은 금리가 3% 중반대부터 시작하지만 서류심사가 까다롭다. 제2금융권인 저축은행의 경우 대출 요건은 까다롭지 않지만 금리가 상대적으로 높고, 법정 최고금리인 20%에 가까운 경우가 적지 않다.

- 상환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경우는 어떻게 하나.
“지금껏 그런 경우는 없었다. 공제회 가입 후 6개월이 지난 회원을 대상으로 실시하고 있어 본격적인 시작은 11월부터 했는데, 올해 1월 기준 24명이 소액대출을 이용했다. 지난해 5월 가입한 청소노동자나 대리운전 노동자가 주된 이용층이다. 1월까지 상환 대상인 18명이 전원 상환했다. 지난해 10월 라이더유니온이 공제회에 가입했는데, 이들이 소액대출을 이용할 수 있는 4~5월 즈음엔 수요가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수요가 늘어나면서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이 커지겠지만 회원 조직과 풀빵이 반반 부담하는 운영 지침이 있다. 감수해야 할 부분이 크지 않다고 본다.”

- 사업 재원은 어디에서 얻고 있나.
“이른바 ‘금고지기’ 운동을 통해 마련하고 있다.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도움을 주고 싶은 사람들, 우리와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에게 1계좌에 100만원씩 해서 3년을 무이자로 맡겨 달라고 한다. 이를 가지고 융자를 해 주는 거다. 100만원이 적은 돈은 아니라서 공개적으로 모집 홍보를 하지는 못했고 12월부터 회원들과 지인 중심으로 모집했다. 의외로 호응이 좋아 122계좌가 모였다. 1억2천200만원이 모인 거다. 가족 단위, 단체, 모임 이름으로 하는 곳들도 있다. 1월로 1차 마감을 했다. 논의를 해서 향후 3차까지, 한 회차당 1억원을 목표로 해서 금고지기들을 모집하려 한다. 금고지기가 되면 신탁증서와 위촉장, 기념품을 드리고 있다.”

“전근대적 공격 여전히 먹혀
노동운동, 공제운동으로 폭 넓혀야

- 윤석열 정부가 노동개혁 드라이브를 걸면서 노조와 대치하고 있다. 지금 상황을 어떻게 보나.
“역대 어느 보수정권보다 강하게 노동자들과 노동운동을 공격하고 있다. 경제·정치·사회 통합이 크게 후퇴하고 있다. 특히나 간첩 같은 이야기는 퇴행적이고 전근대적이다. 문제는 이 같은 전략이 먹힌다는 점이다. 지지층이 단단히 결집할 수 있고, 전체 지지율도 조금 높아졌다. 국민 인식이, 자신들도 노동자이면서 노조운동에 부정적이다. 아쉽다. 폭넓은 노동운동을 기반으로 해서 정부나 사용자와 맞섰다면 오해·왜곡이 좀 덜하지 않았을까.”

- 노동공제연합 풀빵과 여기서 펼치는 공제회 사업은 그 아쉬움을 해소할 수 있는가.
“그렇다. 사실 노동자들끼리 돕는 것 역시 노동운동의 일환이다. 공제회는 노동자들의 자립을 돕는 단체다. 우리나라 노조운동도 처음 1920년대 노동공제회로 시작했다. 노동운동 속에 공제, 서로 돕는다는 정신이 있다. 현재 노동운동은 집단적 노사관계와 정치적 갈등에 집중돼 있다. 노동자 삶 확보에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답답하다. 어려운 삶을 살아가는 노동자들은 자신의 어려움들과는 상관없는 싸움으로 느끼고 있더라. 공제운동으로 우리 주위의 어려움을 해결하고, 우리끼리 힘을 모아 희망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노동자들 사이의 정을 느끼고 있는데, 이런 것들이 이른바 노동자들의 계급성 아닌가. 노동공제운동이 노조운동의 확산이나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는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 노동자들 사이의 정을 느끼고 있다는 말의 의미는.
“가슴이 뜨거워진다. 지난달 22일이 (풀빵) 설립 2주년이었다. 이를 기념해 지난달 31일 회원의 날 행사를 했다. 기본공제로 1년에 1회 명절에 선물을 보내는데, 이번 명절에는 굴을 선물로 보냈다. 일의 특성이나 현 상황으로 명절 선물을 기대할 수 없는 노동자들이 감사하다는 후기를 잔뜩 주셨다. 노동의 특성, 기업 이윤구조상 많이 받는 노동자들이 이를 나누고 많은 사람들을 노동운동에 포함시키는 모습을 보며, 공제는 노동운동의 저변을 넓힌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꼭 필요한 일이었고 필요한 시기에 시작한 사업”

- 풀빵이 설립된 지 2년이 지났다. 지금까지의 활동을 어떻게 평가하나.
“꼭 필요한 일을, 꼭 필요한 때 시작했다고 느낀다. 여러 사업들에 대한 호응들이 있었다. 목표 숫자만큼은 가지 못했지만 확장 기반을 마련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2021년은 본 사업을 위한 준비 기간이었고 2022년은 사업을 본격적으로 펼쳤다. 기본공제 가입 회원 2천명을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1천300명이 넘어섰다. 향후 안정적인 운영을 위해 조직과 재정 확대가 필요한 상황이다.”

- 향후 풀빵의 비전은 무엇인가.
“사업의 구체적 실행과 외연 확장이 과제다. 연결된 이야기다. 회원들에게 질 높고 필요한 금융 서비스를 포함한 공제서비스 확대를 고민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결국 많은 지원 단체들이 함께해 줘야 한다. 병원이나 법률서비스를 제공하는 곳들과 우리가 협약을 맺어서 공제 회원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방안을 연구하고 실천하고 싶다.”

그는 인터뷰 마지막까지 양극화 시대 노동공제운동의 의미과 금고지기 필요성을 강조했다.

“우리나라 국민소득에 놀라곤 합니다. 나에게는 전혀 해당이 안 되는 수치거든요. 양극화 시대입니다. 100만원의 가치는 사람마다 다르겠죠. 누군가에게는 별 돈이 아닐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절박할 수 있습니다. 100만원 빌려준다고 생각하세요. 3년 뒤 돌려드리겠습니다. 잊고 살다가 소파 밑에서 툭 하고 나온, 비상금 찾은 기분일 겁니다.(웃음) 불안정 노동을 하는 비정규 노동자들에게는 상당한 도움이 됩니다. 노동을 크고 따뜻하게 묶어 가는 좋은 일에 쓰일 겁니다. 많이 참여해 주십시오. 저희도 희망을 갖고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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