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건준 아유 대표

초연결 시대의 오작교

까치와 까마귀는 칠월칠석이면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다리를 놓았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물을 넘어 사물과 사물을 실시간으로 연결하는 초연결 사회에서 오작교를 떠올리면 궁상일까. “와이파이 잘 터져요?” 연결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는 듯 자꾸 되묻던 광고를 기억한다. 오프라인 교통망과 온라인 연결망은 넓고 빠르며 촘촘하다.

경제 규모, 수출 규모, 연구개발 투자 규모 등 경제 지표가 대단하다. 실적이 여유를 줄까. 절제 못한 인류는 코로나 바이러스에 비로소 성장을 멈췄다. 그러나 예외 상황으로 밀어낸다. 출산율 하락에 아우성이다. 진보의 결과지만 줄어드는 것을 못 견디는 사람들은 저성장을 오류로 감지한다. 주 15시간 미만 초단시간 노동이 지난해 158만명을 넘어서고 있다는 격차에 관한 수치는 넘치는 정보에 섞여 데이터 늪이 된다.

온라인 연결망을 점유한 것은 누굴까. 누구나 이용하며 공유하는 것만 같은 플랫폼은 돈과 기술을 가진 사람이 소유하는 사업모델이다. 알고리즘에 통제되는 플랫폼이 구석구석 파고들수록 노동은 접속하는 데이터 흐름에 묻혀 분산된다. 노동시민의 물리적 거리는 멀어진다.

단절을 넘어 노동계급 군대로 뭉치던 노동의 물결을 이룬 적도 있지만 요즘 노동은 밀집 대형이 아니다. 하청·외주화를 반복한 노동은 특수고용·자영업·프리랜서의 흐름이 된다. 이를 권리의 거대한 물결로 바꾸는 것은 아직 버겁다. 그러나 계속된다. 방송작가유니온 권지현에 따르면 “노조를 한다는 것은 외로움에서 벗어나는 일”이며 “공감과 이해가 있는 새로운 삶의 영역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권리의 오작교를 향한 노력은 쉼없다.

경쟁 연료의 과소비

마디마디 끊겨 분절된 노동시장, 각자도생이 연대를 흔든다. 차별을 벗어나려 안간힘을 쓸수록 노동도 자원도 더 소비하고 더 많은 탄소를 배출한다. 사회가 차가울수록 지구는 뜨거워진다. 기후위기를 화석연료 탓으로 돌리는 것은 비겁하다. 먼저 돌이켜 볼 것은 인간 심리에서 채굴해 태우는 경쟁이라는 성장 연료다.

책 <미래 공부>에 따르면 2013년부터 3년간의 연구조사(미래워크숍) 결과 참여자의 40%가 폭망하고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붕괴시나리오를 선택했다.(경제계속성장 28%, 변형사회 19%, 보존사회 13%) 2015년 연구에서는 40~50대의 37.9%가 붕괴 미래를 선택했다. 2014년 국민대통합위원회가 의뢰한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52.4%가 탈성장 사회나 대안사회를 30년 뒤 사회로 희망하며 성장주의에 피로감을 드러냈다.

이런 조사연구는 성장중독에 걸린 세계에서 금기며 잊히길 바라는 사람들에게 묻힌다. 그러나 지배 엘리트들은 불안에 휩싸여 격하다. 전쟁과 다극화로 불안한 세계질서, 험해진 남북관계, 정치 없는 진영정치, 저성장에 빠진 경제에 둘러싸여 자신감을 잃은 엘리트는 엉뚱한 출구를 찾는다. 비전이 아닌 비난이다. 북한, 중국, 경쟁 정당, 노조 등 타깃을 만들어 혐오와 적대를 부추긴다. 불안에서 나온 집단 심리다.

동료시민과 탄탄히 연결되면 혐오와 적대는 자랄 수 없다. 하지만 경쟁은 차별을 낳고 계층 사다리를 놓아 간극을 벌렸다. 괜찮은 일자리의 시장교섭력과 조직규모를 기반으로 한 단체교섭력을 가진 노동은 계층 사다리 위로 흐르고, 둘 다 없는 노동시민은 사다리 아래를 흐르며 버틴다. 간극이 벌어진 이 상태에서 연대는 얼마나 소통 가능한 단어일까.

적대, 냉대, 꼰대 그리고 환대

진영에 갇힌 연대는 적대다. 더 모으려 더 씹는다. 넘어서야 할 상대의 위험을 과장해 절멸시켜야 할 적으로 만든다. 적대가 연대고 연대가 적대다. 진영을 나눠 서로를 향해 혐오와 적대를 퍼붓는 정치와 광장이 보여준다. 이익과 권력을 둘러싼 진영이 싸울 때 시민은 권리 사각지대에서 시름한다. 돈과 권력으로부터 독립된 시민사회가 약하면 갈등은 기득권 진영의 패거리 싸움에 휩쓸린다.

간극을 방치하는 연대는 냉대다. 권리 사각지대를 품지 못하는 연대는 닫힌 시스템이다. 경쟁을 익힌 사람들은 각자도생을 위해 능력을 개발한다. 능력주의는 언제든 차별할 준비를 갖춰 연대를 외면한다. 우리는 능력주의를 앞세워 곁의 노동자 정규직화를 반대하는 사례를 봤다. 그 능력자 연대는 노동이 노동을 향해 내뿜는 냉대다.

관성적 연대는 꼰대다. 노조 밖의 노동을 향한 노력에도 분절된 노동의 오작교 건설 기술은 부족하다. 싸워야만 다가오는 투쟁연대는 조직이 없고 투쟁할 수 없는 사람에게 너무 먼 당신이다. 때때로 빛바랜 원칙을 앞세워 지도지침을 주려다 당사자에게 부담을 주는 연대의 속살도 보인다. 스스럼없이 어울릴 마당이 필요하다. 적대 넘어 온정, 냉대 넘어 우정, 꼰대 넘어 다정이 서로를 환대할 에너지다.

다양한 연결

지역과 산업을 잇던 연대는 노조 안 지역본부와 산업별 조직이 됐다. 노조 밖의 노동에 열려있지 않은 시스템은 운동보다 제도로 굳어진다. 매년 2회의 노동자대회는 때로는 성격이 모호한 연례행사다. 투쟁연대는 소중하지만 관심을 끌어야 오기에 사후적이다. 투쟁연대는 모이려면 일상과 단절이 필요하다. 그래서 동원 조직이 없거나 주목받을 투쟁을 못하는 사람에게 제한된다.

일상의 연대로서 생활문화연대를 희망연대노조가 보여줬다. 전국적, 전 산업적 모델이 된 것은 아니지만 일부 지역과 사업장에서 연대기금을 만들어 나눈다. 시민단체 활동가를 지원하는 ‘동행’도 있다. 사용자 지불능력도 노조 역량도 약한 곳에서 서로 돕는 노동공제회를 탑재해 모인다. 이 모든 사례들은 환대를 위한 노력이다.

디지털 연대도 있다. 온라인 커뮤니티들이 늘었다. 대통령실 답변과 조치, 국회에서 다루게 만들려는 온라인 청원도 사이버 연대다. 온라인은 오프라인 대체제가 아닌 보완재이지만 시민사회 활동가를 위한 플랫폼 개발 노력도 있다. 디지털 행동주의는 온오프라인 경계를 넘어 사회운동 모델로 발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직 익숙지 않다.

축제로서 연대

환대는 같이 만드는 가치 연대다. 인권은 동물권으로 확장되고 모든 생명을 향해 간다. 지난해 9월24일의 기후정의 행동은 새로운 가치를 향한 연대였다. 인간 사회에서 막힌 권리는 확장이 어렵다. 노동을 내치며 일자리를 늘리는 습관은 더 많은 자원을 소비해 자연을 착취하는 성장주의다. 일자리를 나누고 서로를 돌보는 ‘나눔과 돌봄’의 노동윤리가 탄소배출을 줄여 지구별 생명을 환대할 기초다. 연대는 모든 생명을 지구시민으로 환대하며 재구성돼야 한다.

변한 산업에서 관계를 맺고 권리를 찾아가는 방법은 충분하지 않다. 정보를 나누고 어울릴 마당이 필요하다. 성공과 시련이 엇갈리는 신생노조들이 고충을 나누며 서로 보완할 연결 마당이 필요하다는 얘기도 듣는다. 기성노조와 무권리 노동 사이를 메우는 중간지원조직이 하나의 영역이자 새로운 언더독이 될 가능성을 보는 사람들도 있다.

다양한 바람을 담아 상호작용을 통해 만드는 축제로서 연대가 생기면 좋겠다. 노동을 데이터로 만든 플랫폼은 알 수 없는 알고리즘으로 설계된다. 숨겨진 의도까지 설계하는 것이 엔지니어다. 우리는 엔지니어가 아니다. 노동시민을 위한 연결은 함께 만드는 것이다. 누군가의 목적 따라 설계된 회의(콘퍼런스)가 아니라 열린 만남(언콘퍼런스)이다. 각각의 고유성과 가능성을 발견하는 열린 상호작용을 통해 환대하는 축제의 오작교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아유 대표 (jogju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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