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민 충청남도노동권익센터 정책기획팀장

어떤 존재의 시작은 무엇으로 가늠할 수 있을까. 어느 때, 어느 공간 혹은 어떤 인식, 어떤 사건, 어느 무엇. 음력 설은 태어나고 스스로 서서 걸음을 내디딜 수 있을 무렵까지 자란 시골 마을 가까이 바닷가에서 맞이했다. 떠오르는 새해를 자욱한 안개 너머로 가늠하려 시간을 흘려보냈다. 안개 사이, 구름 너머에서도 시린 겨울의 내음에 온기를 더하는 새로운 한 해의 볕 아래에서 한낮을 보내고도, 저물고 피어나는 계절이나 어떤 시작을 감각하기 어려웠다. 떠나고, 떠나왔다. 떠나고 떠나서도 답을 벼르기가 어렵다. 홀로 앉아 채운 술잔에, 며칠 전 아침의 기억들이 차올랐다. 한가로운 상념들이 이내 흩어진다. 잔을 비울수록, 한 손에 쥔 작은 잔의 무게가 더욱 무겁다 여겨졌다. 

설연휴를 며칠 앞둔 월요일, 그날 아침의 기억들이 내가, 우리가 발 붙이고 선 땅에서 움트는 존재들의 박동을 선연하게 감각하게 했음을 지나와 깨닫는다. 월요일 새벽, 이르게 깨어나 정책기획팀 동료들과 함께 장항선 기차를 타고, 천안으로 향했다. 천안 유량로, 유일주류 앞, 시린 겨울바람에도 어깨를 맞대고 거리를 지켜 서 있는 사람들을 만났다. 

이날 희망노조 유일주류지회 투쟁 선포 약식 결의대회에 함께했다. 희망노조는 작은 사업장 노동자들 모두의 노조할 권리를 위해 2020년 민주노총 세종충남본부의 직가입 노조로 설립했다. 일하는 모두를 위한 ‘일상의 희망! 일터의 희망!’을 만들어 가기 위해 여러 활동들을 이어 가고 있다. 

유일주류지회는 희망노조의 첫 번째 사업장이다. 천안에 위치한 유일주류는 지역에서는 비교적 규모가 큰 주류 유통업체로, 충남 전역과 경기·서울 등 타 지역에도 주류를 배송하고 있다. 2021년 5월 유일주류 배송기사인 김태운 유일주류지회장이 센터에 찾아왔다. 동료 배송기사들의 퇴직금 지급 관련 노동상담을 했고, 이 과정에서 퇴직금 지급뿐만 아니라 주류 배송기사들의 노동현실 개선을 위해 노동조합 활동이 필요하다는 데에 공감하고, 희망노조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유일주류 전체 배송기사 22명 중 18명이 조합원으로 가입했고, 희망노조 유일주류지회를 설립했다. 센터에서는 ‘상담에서 조직화’로 라는 민주노조 운동 상담 활동가들이 마음에 품고 있는 문구를 처음으로 구현한 사례고, 희망노조에는 첫 사업장 지회 설립이었다.

지회 설립 이후 희망노조는 주 1회 모임을 하면서 조합원들과 함께 임금·단체협약 요구안을 마련하고, 2021년 7월 노조 설립과 교섭 요구안의 내용을 사측에 공문으로 전달했다. 공문을 발송한 직후 유일주류는 온갖 부당노동행위를 저지르면서, 조합 활동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조합원들에 대한 압박과 회유가 이어졌고, 17명의 조합원들이 탈퇴했다. 조합원들 요구안의 주된 내용은 배송기사들이 일을 지속하면서 삶이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근속 기간에 따라 기본급과 수당이 조금이라도 인상됐으면 한다는 것, 먼 거리를 운전해서 배송하는 기사들에 대해서는 외곽수당을 지급하자는 것. 교섭 과정에서 사측은 조합원들의 요구를 적극 반영해 곧 시행하겠다고 약속하고, 이를 반영한 임금체계안을 직원 전체모임에서 제시하고 설명하기도 했다.

두 번 해가 바뀌었지만, 사측이 약속했던 임금인상안은 여전히 지켜지고 있지 않다. 오히려 기존에 지급해 왔던 조정수당(매출이 1억원을 초과했을 때 배송기사에게 지급했던 수당)과 공병수당(업소에서 공병을 수거했을 때 배송기사가 받게 되는 수당)마저 노동자들과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없애 버렸다. 홀로 노동조합을 지키고 있는 지회장에게는 충남 당진·홍성·서산·태안지역으로 부당한 인사발령과, 사소한 배송 착오를 명분으로 감봉 6개월의 중징계를 내렸다. 지방노동위원회와 중앙노동위원회에서 사측의 부당인사발령과 부당노동행위를 인정했으나, 유일주류는 행정소송을 제기하고 노조활동에 대한 탄압을 지속하고 있다. 

거센 탄압과 고립된 상황에서도 김태운 지회장은 홀로 어려운 투쟁을 이어 가고 있다. 희망노조는 김태운 지회장과 함께 유일주류와 배송 노동자들 모두의 지역 배송노동자들 모두의 노동권 실현을 위해 지난 1월 중순부터 매주 수요일 유일주류 앞 출근 선전전을 비롯한 여러 연대 활동을 이어 가고 있다. 도로가 얼고, 불어오는 바람과 굵은 눈송이가 시야를 가릴 때도 매주 수요일 이른 아침 유일주류 앞에 함께 모여 어깨를 맞대고, 유일주류 배송기사들이 함께 만들었던 더 나은 일과 삶을 위한 요구들을 거듭 외치고 있다. 지역의 여러 노동조합과 노동사회단체 활동가들, 노동자, 시민들의 연대가 이어지고 있다. 

출근 선전전을 마치고, 업무를 위해 유일주류 건물 안으로 홀로 걸어 들어가던 김태운 지회장의 뒷모습이 내내 마음에 남는다. 김태운 지회장의, 지역 노동자들의 외침이 커다란 울림으로 유일주류 동료들에게, 지역의 더 많은 노동자와 시민들에게 가 닿기를 바란다. 우리의 일상, 술 한잔에 담긴, 주류 배송노동자들의 노력과 고단함을 함께 헤아릴 수 있기를 바란다. 출근 선전전에 내내 함께하고 있는 톨게이트 노동조합 노동자들이 보여준 것과 같이, 함께 ‘싸우는 노동자가 이긴다’는 것을 우리의 공감과 우리의 연대로 다시 한번 함께 증명해 낼 수 있기를 바란다. 

충청남도노동권익센터 정책기획팀장 (recherche@cnnodong.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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