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시운 공인노무사(서울노동권익센터)

“낮은 곳으로 향하는 연대”

내가 일하는 서울노동권익센터의 홈페이지 소개글에 있는 문구다. 이 땅의 모든 노동자가 녹록지 않은 환경에서 일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특별히 더 소외되고, 더 차별받으며, 더 불안정한 일터에서 노동하고 있기 마련이다. 그러한 취약노동자의 노동권 보호를 위해 센터는 “낮은 곳”을 바라보며 법률·교육·정책·조직화·커뮤니티 지원 등 많은 사업을 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센터의 노무사들은 권리구제지원 사업을 중심으로 업무를 수행한다. 이 사업은 월 300만원 이하를 받는 취약노동자에게 사건대리를 무료로 지원하는 제도다. 국선노무사가 노동위원회 절차만 대리할 수 있는 것과 달리, 노동청과 산재 사건도 지원한다는 것이 차별화된 장점이다. 실제로 지난해에는 이 제도를 통해 210여명의 노동자가 도움을 받았다. 체불금액이 매우 소액이거나, 인정 가능성이 극히 낮더라도 당사자 권리회복에 유의미한 도움이 된다면 지원이 가능하다. 그렇기에 사설 노무시장이 품기 힘든 취약노동자를 도울 수 있다는 뿌듯함을 느끼고 있다.

센터에서 일하다 보면 노동청과 노동위·경찰서·각종 센터를 떠돌다가 우리 센터까지 떠밀려 온 불안정한 노동자들을 자주 보게 된다. 그들은 깊은 상처를 입어 자존감이 낮아져 있고, 화로 가득 차 있다. 사이비 종교의 신도였다가 교주 딸이 운영하는 의류소매업체에서 21개월여간 총체적 노동착취를 당하며 무급으로 일한 노동자, 1개월 초단기계약과 입주민 갑질로 고통받는 경비노동자, 장기간의 직장내 괴롭힘으로 고통받는 노동자 등. 하루에도 십수 개씩 쏟아지는 사실관계를 들으면서 일을 하다 보면 머리가 팽팽 돌 지경이다. 5명 미만이나 노조가 업는 사업장에서 노동법은 앙상한 이상론처럼 들리고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는 냉소적인 말이 뼈저리게 느껴진다.

그러나 지난해 겨울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는 냉소는 나를 포함한 우리 센터의 노동자들에게도 매서운 칼바람처럼 다가왔다. 국민의힘이 장악한 서울시의회가 센터 예산을 전면 삭감하겠다고 엄포를 놓았기 때문이다. 시의회 감사에서 지적받은 사항이 없었고, 센터의 1년 성과가 좋았다는 점에서 근거 없는 겁박이었다. 본회의 등을 거치면서 다행히 일부 복구되기는 했지만 사업비는 대폭 삭감됐다. 배정된 인건비는 전체 인원의 1년 급여를 대기엔 부족한 상황이다.

도급·용역·파견 등과 같은 형태로 이뤄지는 삼각관계의 원·하청 간 책임 미루기는 한국 노동시장에서 벌어지는 전형적인 모순이다. 근로계약상 상대방이 노동법상 법적 의무를 다해야 하지만, 삼각관계에서 하청사업주는 스스로 ‘바지사장’이라 칭하며 온갖 책임을 회피하기 쉽다. 센터 역시 민간위탁 구조로 운영되는데, 근로계약의 상대방인 센터장·수탁기관과 예산 배정을 결정하는 서울시·서울시의회가 다른 주체다. 물론 수익사업이 없고 ‘민간위탁’이라는 기관 특성상 일반적인 노사관계와 다른 측면이 있지만, 삼각관계의 모순 속에서 모든 피해를 감당해야 하는 것은 결국 ‘하청’업체의 노동자들이다.

누군가에겐 예산 배정이 숫자놀음에 불과할 테지만, 그 숫자가 현실로 다가오자 사업장은 복잡한 이해관계와 긴장감·모멸감이 섞여 술렁였다. 각종 수당 및 복리후생비가 사라졌고, 호봉이 동결됐다. 추가예산이 편성되지 않으면 하반기에는 더욱 고강도의 임금삭감이 이뤄진다는 이야기가 언급되고 있다. 인생을 계획하려면 안정적인 일터가 필수이건만, 통제하기 어려운 외부 상황이 일터를 흔들면서 온갖 계획들이 흐트러졌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우리는 노동센터의 존재의의를 잘 알기에 열심히 사업을 수행해야 한다. 본인 동의 없이 임금을 삭감당했다거나, 용역업체 변경으로 고용관계가 단절됐다는 전화상담이 올 때마다 목에 걸린 가시처럼 “저희도 비슷한 상황입니다”라는 말이 나올 것 같지만, 프로정신을 발휘해 넘어갈 수밖에 없다. 노무사로서 당사자의 맥락을 보다 심층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뜻밖의 순기능이 생겼다는 웃픈 농담을 하기도 한다.

삭감 국면에서 센터노동자인 우리가 어떻게 존엄성을 지켜 가며 노동할 수 있을지, 최악의 상황을 어떻게 방어할 것인지 서로 다독이며 찾아가야 한다. 내가 노동자로서 부당함에 저항하지 않으면, 노동자를 만날 때 떳떳하지 못한 노무사가 되겠다는 마음도 든다. 부당한 예산 삭감은 센터노동자들의 노동환경 악화로 끝나지 않고, 그 사업의 수혜자인 취약노동자에게 피해로 돌아갈 것이다.

지난주에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봤다. 허탈한 패배의 상징으로 알려진 ‘북산엔딩’이 예정돼 있다는 걸 우리는 안다. 그러나 관객들이 박수를 보내고 눈물을 훔치는 것은 “패배로 예정된 결과”보다 “싸우는 과정에 얼마나 치열하고 우직하게 최선을 다하는지”가 중요하기 때문이 아닐까. 노동자로서 존엄성을 지키면서, 불합리한 횡포에는 저항하면서 동료들과 함께 “싸우는 과정”을 만들어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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