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혜경 노동법 박사

영국의 역사학자인 에드워드 카(Edward Hallett Carr)는 가치와 사실의 관계에 대해 하나의 관점을 제시해 주고 있다. 인간과 환경의 투쟁을 과장해 사실과 가치를 부당하게 대립시키거나 부당하게 분리시키지 말아야 하고 역사에서의 진보는 사실과 가치의 상호의존과 상호작용을 통해서 성취된다고 했다. 가치와 사실은 상호의존하고 또한 상호작용한다는 그의 주장은 “가치는 사실에서 나온다”라는 명제와 “사실은 가치에서 나온다”라는 명제가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두 명제가 상호작용해 객관적인 역사가 이뤄질 수 있음을 말해 준다.

사실과 가치가 상호의존하고 상호작용한다는 인식에 근거해 단결권의 성격과 관련해 그동안 소홀히 해 왔던 사실을 고찰함으로써 우리나라의 노동운동이 어떤 사회·경제적 배경하에서 어떤 특수한 성격을 띠고 전개해 왔는지를 평가해야 한다.

노동법학의 기본적 근거인 단결의 원리에 대한 성격 파악에서 우리는 지배적인 생존권의 논리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생존권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라는 초역사적 개념으로서 현실을 은폐하거나 부정하는 이데올로기 지향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그러나 생존권 이론의 가장 중요한 한계는 그것이 우리 사회에서의 ‘사실’에 맞지 않다는 점이다.

단결권 등 노동 3권은 본질적으로 자유를 지향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나라의 노동운동과 생존권 이론을 검토해야 한다. 우리나라 일제강점기의 노동운동은 반일 민족해방운동의 연장선에서 폭력적·정치적으로 전개됐다는 점, 해방 이후 미군정 시기에는 일제 식민지배의 잔재를 청산하고 자주독립국가를 수립하려는 의지로서 주요하게 전개된 점, 그리고 산업화과정의 중심을 이루는 1970년대와 1980년대는 군사독재정권의 억압적·폭력적 통제하에서 자유와 민주화를 위한 열정으로 전개된 점을 봤을 때, 단결권을 포함한 노동 3권은 자유를 지향하는 본질적 성격을 보인다고 평가할 수 있다.

사실의 측면에서 우리나라 노동운동이 어떻게 전개됐는가를 일제시대, 미군정기, 이승만 정권 전반기 및 후반기, 1960년대 및 1970년대 박정희 정권 시대, 1980년대 신군부 정권 시기, 김영삼 정권 시기의 노동법과 노동운동으로 평가하고자 한다. 이 글은 유혜경 저 <일제강점기 노동운동에서 김영삼 정권기 노동법과 노동운동까지>(도서출판 선인, 2022년)의 책을 요약했다.

수탈의 첨병 동양척식주식회사, 그리고 회사령 공포

일본이 한국을 ‘합병’한 것은 1910년 8월29일이다. 합병이란 국제법상 인격자로서의 한국 존재를 없애고, 본래 한국의 영토였던 토지를 일본의 영토로 하고 본래 한국의 국적을 소유했던 인민으로 하여금 일본국적을 소유토록 하는 것이다.

일제는 조선을 합병한 후 조선에 조선총독부를 두고 위임된 범위 내에서 육·해·군을 통솔하고 일체의 정무를 통할토록 했다. 일제 통치하의 조선 상태를 논할 때는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무시할 수 없다. 그 외 일제는 회사령·토지조사사업·임야조사를 통해 조선의 토지와 자본을 수탈했다.

첫째,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설립을 통한 수탈이다. 회사 설립의 표면적 취지는 “한국을 지도·계발함으로써 조선민족으로 하여금 문명의 혜택을 받도록 하는 국제적 사명과 식산흥업(殖産興業)을 진흥함으로써 조선민족의 생활을 향상시킴과 동시에 국가재정의 자원을 배양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의 원재무국장이 술회하고 있듯이 “동척(東拓)은 일반 은행과 같이는 예금을 하지 않는 금융기관인 것이다. 그래서 돈을 대출할 때는 저당을 잡는데 토지 이외는 없다. … 토지는 저당 기한이 넘으면 모두 동척(東拓)의 것이 된다. 이것이 일종의 원한이 된다. 돈을 빌려주고 적지 않은 토지를 거둬들였다”라고 말해 이런 짓을 해서 돈을 버는 것이 동척(東拓)의 진정한 목적이었음을 보여준다.

둘째, 회사령 공포와 그에 의한 수탈이다. 회사령은 1910년 조선총독부 제령 13호로 공포된 것으로 주요 조문은 다음과 같다.

제1조 회사의 설립은 조선총독의 허가를 받을 것.

제2조 조선 외에서 설립된 회사가 조선에 본점 또는 지점을 설치코자 할 때는 조선총독의 허가를 받을 것.

제3조 회사가 본령 또는 본령에 근거해서 발포하는 명령, 허가의 조건에 위반하든가, 또는 공공질서 선량의 풍속에 위반하는 행위를 했을 때는 조선총독은 사업의 정지, 금지, 지점의 패쇄 또는 회사의 해산을 명할 수 있다.

제6조 부실한 신고를 해서 제1조 또는 제2조의 허가를 받았을 때에는 조선총독은 그 허가를 취소할 수 있다.

이 회사령의 영향은 조선에 본점을 둔 일본인 기업과 조선인 기업 간 수의 차이와 자본금의 차이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민족자본 억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면 합병 당시인 1911년에는 조선인이 설립한 회사는 27개사였는데 6년 후인 1917년에 이르러서는 겨우 37개사밖에 안 돼 10개사가 늘어나는 데 그쳤지만, 일본인이 설립한 회사는 1911년의 109개사에서 1917년의 177개사로 한꺼번에 68개사가 늘어났다. 자본금의 면에서 보면 그 격차는 더욱 심하다. 조선인 기업에서는 1911년의 공칭(公稱)자본금 739만5천원, 불입자본금 274만2355원이었던 것이 1917년에는 공칭자본금 1천151만8천140원, 불입자본금 587만1천242원으로 돼 대체로 2배 정도밖에 증가하지 않았다. 일본인 기업에서는 1911년 공칭자본금 105만1천550원, 불입자본금 506만3천20원이었던 것이 1917년에는 공칭자본금 5천919만2천200원, 불입자본금 3천801만9천492원으로 일약 6배 가까이 증가했다.

회사령은 조선의 민족자본을 억제하려는 목적의 식민정책으로 조선의 자본가를 수적으로, 자본금으로도 억제시키려는 정책이었다.

땅도 일본인의 소유로

토지조사사업과 임야조사

셋째,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조선의 토지를 합법적으로 일본인의 손에 넣는 것을 보장해 줬다. 토지조사는 1910년 3월에 한국 정부가 시작했고 9월부터는 조선총독부가 인수했다. 총독부에 따르면 “상공업이 아직 발달되지 않고 토지를 유일한 생산의 근원으로 삼고 있는 조선에서는 토지의 권리를 확실하게 해서 지세의 부담을 공평하게 함으로써 토지의 생산력을 증진토록 해야 하는 필요성이 특히 긴급하고 간절하다”고 그 목적을 말하고 있다.

토지조사령 4조는 토지의 소유자는 조선총독이 정하는 기한 내에 그 주소, 씨명 또는 소유지의 명칭과 소재지 목자번호(目字番號), 사표등급(四標等級), 지적결수(地積結數)를 임시 토지조사국에 신고할 것이라고 해 신고(申告)에 의한 토지소유권을 인정하고 있다.

토지조사에 의해서 조선전토의 토지사유권이 확립됐지만 사유(私有)를 증명하지 못해 국유지로 된 논·밭과 호전은 2만6천800여 정보였다. 택지는 50정보였으며 역둔토(驛屯土)로서 국유지가 된 것은 1912년에 13만4천여 정보였다. 이렇게 해서 경작자가 토지를 잃고 구관료의 토지수탈이 법적으로 공인됐다. 조선 농민의 몰락은 여기서 시작됐다고 말해도 타당하다.

넷째, 임야조사를 통한 토지 수탈이다. 총독부는 1918년 조선임야조사령을 공포했는데 “조사령 3조에서 임야의 소유자는 도장관(道長官)이 정하는 기간 내에 씨명(氏名) 또는 명칭(名稱), 주소 및 임야의 소재와 지적을 부윤(府尹) 또는 면장에게 신고할 것, 국유임야에 대해서는 조선총독이 정하는 연고가 있는 자는 전항의 규정에 준해 신고할 것, 이 경우에는 그 연고까지도 신고할 것, 전항의 규정에 의한 연고자가 없는 국유임야에 대해서는 보관관청인 조선총독이 정하는 바에 따라 1항에 규정하는 사항을 부윤 또는 면장에게 통지할 것”이라고 하고 있다.

신고주의에 따라 서증에 의한 계출(屆出)로써 사유권을 확정했기 때문에 이것을 하지 못한 토지가 국유림에 편입됐다. 조림대부제도에 따라 총독부가 국유림에 편입한 임지를 일본인에게 대부하고, 그 조림이 성공한 후에 그 일본인에게 양여(讓與)됨으로써 합법적으로 사유권이 불분명한 임야를 일본인 소유의 토지로 만들었다.

이렇게 동양척식주식회사 설립, 회사령, 토지조사사업, 임야조사사업을 통해 일제총독부는 한국의 토지와 자본을 수탈했고 그에 기반해 일본 자본 축적을 이뤄냈다.

노동법 박사 (laborkyu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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