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호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5년 만에 고은이 문단에 복귀했다.

경향신문은 지난 10일 1면 사이드에 ‘성추행 한마디 반성 없이 고은, 5년 만에 문단 복귀’라고 썼다. 경향신문은 이날 1면에 이어 20면 머리에도 시인과 출판사를 강하게 비판했다. 경향은 “예술의 자유를 빙자한 폭력은 더 이상 허용돼선 안 된다”는 여성문화예술연합 대표의 발언도 옮겼다.

고은 복귀는 매일경제도 같은날 26면에 1단 기사로 다뤘으니 경향 단독보도도 아니다. 미투에 발 빠르게 대응한 한겨레는 하루 늦게 지면에 보도했다. 그것도 주요 면이 아닌 20면 맨 아래쪽에 썼다.

불매운동까지 번지자 실천문학사가 지난 20일 사과문을 냈다. 다음날 동아일보는 8면에 ‘고은 시집 낸 실천문학사 깊이 사과 … 시집 공급 중단’이라고 보도했다. 하지만 경향신문은 더 강하게 실천문학사를 비판했다. 경향은 21일 2면에 실천문학사가 앞에선 사과하면서도 “여론 압력에 출판의 자유를 포기해야 하는지에 대한 결정이 날 때까지”라며 사태의 원인을 ‘여론의 압력’으로 돌렸다고 비판했다.

한겨레가 경향보다 늦게 보도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경향이 1면 사이드에 포문을 연 1월10일자 한겨레신문 같은 지면엔 ‘대표이사·편집국장 사퇴를 알려드립니다’는 사고(社告)가 실렸다. 김만배에게 9억원을 빌린 한겨레 간부 사건 때문이다. 무슨 정신이 있었겠나.

나는 2011년 12월16일 이 지면에 실천문학사를 거론했다. 그해 한진중공업 희망버스를 주도한 송경동 시인이 출간한 산문집 <꿈꾸는 자 잡혀간다>를 축하하는 내용이었다. 나는 당시 첫 문장을 “출판사부터 맘에 안 든다”고 썼다. 송 시인 책을 낸 곳도 ‘실천문학사’였다. 당시 내 기고의 일부다.

“(2011년 봄까지) 실천문학사 사장을 지낸 먹물 소설가 김영현이 90년대 초 ‘포스트 모더니즘’ 논쟁으로 얼마나 많은 운동가를 전선에서 이탈시켰는지 더 물어 무엇하리. 당시 김영현은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를 휘둘러 대면서 무너진 사회주의의 이상을 조롱하듯 부관참시하며 숱한 부역으로 피를 뿌렸다. 마치 열린우리당이, 민주당이, 국민참여당이, 안철수가, 박경철이, 박원순이 그러하듯. 늘 비슷한 척하며 접근해 끝에 가선 변신했다.”

그때는 안철수가 지금처럼 괴물이 되리라곤 아무도 생각 안 했다. 그러나 나는 그가 북콘서트 하고 다닐 때부터 이상했다.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은 종이 한 장 차이도 없다. 어쩌면 민주당이 더하다. 민중과 한 편인 척 접근해 뒤통수치니까.

실천문학은 1980년 고은 등이 창간해 태생적 인연이 있다. 90년대 망해가는 걸 소설가 김영현이 살렸다. 모든 출판사가 돈벌이에 혈안인데, 문학의 본질을 설파하는 척하며 접근하는 이들을 나는 더 혐오한다.

5년 전 최영미 시인의 미투는 용기 그 자체였다. 하지만 최 시인 역시 포스트 모더니즘의 수혜자다. 그가 2017년 유명 호텔에 1년간 방 하나 달라고 이메일 보낸 건 그리 큰일이 아니다. 그가 90년대 중반 유럽을 여행하고 1999년에 쓴 <시대의 우울>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김포공항에 내렸다. 짐을 찾고 세관 수속, 환전 등 입국에 필요한 절차를 마치고 청사 바깥으로 걸어 나오며 마주친 얼굴들은 왜 그리 여유 없어 보이던지. 긴장된 눈빛과 퉁명스러운 표정을 한 사람들이 쏜살같이 앞만 보고 달리는 모습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긴 한국인 것이다. 눈만 마주쳐도 뱅긋 웃으며 ‘봉주르’라고 인사하지 않아도 되고, 남의 옷깃을 스쳐도 ‘빠르동’이라고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곳. 몇 달만 떠나 있으면 신문의 정치면을 해독하기 힘든 나라, 대한민국. 바로 나의 조국인 것이다.”

그대로 돌려준다. “잔뜩 화난 듯 빠르게 걷는 사람, 보행자가 횡단보도 천천히 걷는다고 빵빵 치는 운전자,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에도 부리나케 달려와 방문을 쾅쾅 두드리는 이웃, 방에 인터넷 설치하려면 한 달은 족히 걸리는 나라.” 맞다. 프랑스다. 좋은 프랑스 사람도, 좋은 한국 사람도 있다.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leejh6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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