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서초구 서초동 대법원 청사 전경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노동자가 임금을 체불한 원청의 처벌을 희망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표시한 데에는 직상수급인과 하수급인도 포함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은 원청인 상위 수급인이 임금지급의무를 이행하면 하청(직상수급인)과 재하청(하수급인)의 임금지급의무도 함께 소멸한다고 봤다.

하도급대금 미지급에 ‘연쇄 임금체불’
피해자 고소취하에 원청 대표 공소기각

9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1부(주심 오경미 대법관)는 플랜트제조업체 대표 A씨와 하청 대표 B씨, 재하청 사업주 C씨의 근로기준법 위반 혐의에 대해 공소기각 결정한 원심을 최근 확정했다. 공소기각 결정은 형사소송법상 소송조건에 흠결이 있을 때 소송을 종결시키는 제도를 말한다.

김해에서 플랜트제조업을 운영하는 A씨는 2014년 4월께 B씨에게 사일로 제작을 도급했다. 이후 B씨는 개인사업주 C씨에게 다시 사업 일부를 재도급했다. 그런데 C씨는 노동자들의 임금과 퇴직금 합계 7천200여만원을 지급하지 않아 재판에 넘겨졌다.

원청 대표 A씨와 수급인 B씨도 연대책임을 물어 함께 기소됐다. 검찰은 이들이 하도급대금을 정당한 사유 없이 지급하지 않았다고 봤다. 근로기준법(44조)에 따르면 여러 차례의 도급이 이뤄지는 경우 하수급인(C씨)이 직상수급인(B씨)의 귀책사유로 임금을 체불한 경우 연대해 책임을 진다. 직상수급인(B씨)의 귀책사유가 상위 수급인(A씨)의 귀책사유에 따라 발생한 때에도 연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1심은 근로기준법 위반 혐의와 관련해 B·C씨에게 각 벌금 300만원을 선고했다. 다만 A씨의 경우 피해자 24명이 기소 이후 처벌을 희망하지 않는다는 의사표시를 했다며 공소기각 결정했다. 피해자의 의사와 다르게 ‘도급사업에 대한 임금 미지급’ 혐의를 기소할 수 없다고 정한 근로기준법(109조2항)에 따른 것이다. 일부 직원들은 민사소송 조정을 통해 체불임금을 받은 뒤 고소취하서를 제출했다.

“원청과 합의시 하청·재하청 처벌 희망 드물 것”

항소심에서 B씨와 C씨가 법리오해 주장을 꺼내며 상황이 반전됐다. 쟁점은 상위 수급인(원청)에 대한 처벌불원 의사표시에 하청과 재하청의 처벌불원 의사도 포함되는지였다. B·C씨측은 피해 직원들이 고소를 취하해 A씨의 연대책임이 소멸했으므로 자신의 지급책임도 소멸했다고 주장했다.

항소심은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1심을 뒤집고 B·C씨에 대한 공소를 기각했다. 재판부는 “상위 수급인 A씨에 따라 하수급인(C씨)의 임금지급의무가 이행됨으로써 임금지급의무 불이행의 위험이 해소됐다면 하수급인은 물론, 직상수급인인 B씨의 책임도 소멸한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판시했다.

대법원도 원심이 옳다고 봤다. 재판부는 “하수급인의 근로자가 자력이 더 나은 상위 수급인을 상대로 직접 임금을 청구하는 등 법적 조치를 취할 여지가 많다 보니, 합의 과정에 참여하지 못한 하수급인이나 직상수급인에 대해서는 처벌을 희망하지 않는다는 의사표시가 명시적으로 이뤄지지 않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며 “이러한 경우에도 귀책사유가 있는 상위 수급인과 합의한 근로자가 하수급인이나 직상수급인만 따로 처벌받기를 원하는 경우는 상당히 드물 것”이라고 판단했다.

특히 ‘처벌불원 의사’ 판단과 관련해 구체적인 기준을 제시했다. 재판부는 △법적조치 상대방 △상위 수급인과 합의 과정 △처벌불원 경위 △처벌불원 의사표시에 하수급인이나 직상수급인 명시적 제외 여부 △임금지급채무 이행 여부 등을 고려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를 전제로 “하수급인과 직상수급인을 배제한 채 오로지 상위 수급인에 대해서만 처벌을 희망하지 아니하는 의사표시를 했다고 쉽게 단정해서는 안 된다”고 판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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