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창

“1999년 ‘8월의 크리스마스’라는 이름으로 민주노조를 만들었습니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힘차게 시작했지만 돌아온 건 한 사람당 1천만원의 가압류와 부당한 부서 이동이었습니다. 20년이 지난 지금, 저는 또 앞에 섰습니다. 머리는 그만하자고 했지만 가슴속의 신념이 외치는 소리를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2018년 7월20일 보건의료노조 가천대길병원지부가 설립된 뒤 이철행 가천대길병원지부 부지부장이 ‘간부 텔레그램방’에 올린 글이다. 이철행 부지부장 설명에 따르면 1999년 인천중앙길병원 노동조합 발기인대회를 열기 위해 모였지만 구사대가 들이닥쳐 무산됐다. 2007년 두 번째 시도는 기업노조 위원장이 바뀌면서 피어났지만 병원 편에 선 노조간부들에 의해 결국 좌절됐다.

2010년부터 보건의료노조에서 신규 조직화 사업을 담당한 김형식 전략조직위원이 쓴 <노동의 새로운 봄-보건의료노동자의 길>(삶창·1만9천원·사진)에는 가천대길병원을 포함해 5개 병원에 대한 조직화 사례가 담겼다. 전체 기획은 노조가 했다. 노조설립 당시 함께한 현장 노동자들을 인터뷰하고 당시 배포한 성명서나 단체대화방 등을 토대로 기록했다. 조직화 사업 사례를 자료집 형태가 아닌 단행본 형식으로 공유한 것은 이례적이다.

가천대길병원 세 차례 시도 끝에 만든 노조

가천대길병원에서는 사측의 지속적인 탄압에도 2018년 민주노조 설립을 위한 세 번째 시도가 이뤄졌다. 출근시간은 기록하는데 퇴근시간은 기록할 수 없는 출퇴근 관리 관행으로 인한 ‘공짜노동’을 비롯해 불만이 쏟아져 나왔다. 기업노조와 병원측은 문제 해결에 나서지 않았다. 가천대길병원지부 설립 일주일 만에 조합원 1천52명이 모였다. 가천대길병원 노동자들이 병원 설립 60년 만에 처음 파업을 했지만 병원측의 교섭해태는 계속됐다. 인천지방노동위원회 사후조정으로 파업 14일 만에 임금·단체협약을 마무리했다.

병원측의 노조탄압과 복수노조에 따른 어려움은 다른 병원도 비슷하게 겪었다. 부산대병원이 그랬다. 2012년 6월 설립된 부산대병원지부는 같은해 8월 단체교섭을 요구했다. 그런데 병원측은 단체교섭 요구 사실을 공고하지 않았고, 그사이 양산분원에서 복수노조가 만들어졌다. 개별교섭으로 진행된 단체교섭은 한 발짝도 나아가기 어려웠다. 병원측은 “조합원의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지위를 향상하고”에서 ‘정치’를 빼고, 단결권·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 앞에 ‘정당한’을 삽입할 것을 요구했다. 지부는 병원측과 줄다리기 끝에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며 50차례 넘는 교섭을 거쳐 임단협을 체결할 수 있었다.

노조 뿌리내리려고 서울에서 부산까지 1년여간 이동

‘간부 찾기’에 어려움을 겪는 상황도 있었다. 2010년 4월 국립중앙의료원이 법인화되면서 직원들도 공무원 신분에서 민간 신분으로 전환됐다. 공무원으로 남기를 희망하는 직원들은 지방으로 발령됐다. 공무원 신분을 포기한 이들은 보건의료노조 국립중앙의료원지부를 출범했는데 지부장을 맡을 사람이 없었다. 제일 연장자인 김문자 간호사가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에 결국 총대를 멨다. 국립암센터 원장 당시 성과연봉제를 만든 국립중앙의료원 초대 원장이 추진한 연봉제 도입을 막았다.

대부분의 조직화 사업이 중앙 주도로 이뤄진 것과 달리 동남권원자력의학원의 경우 서울 본원에 조직된 한국원자력의학원지부 주도로 이뤄졌다. 서울 노원구 한국원자력의학원에서 부산 기장군 동남권원자력의학원에 노조를 뿌리내리기 위해 한국원자력의학원지부 간부들은 1년여간 서울과 부산을 오갔다. 매주 짧게는 1박2일을, 길게는 3박4일을 부산에서 보냈다. ‘서울하고 다르다’는 이질감과 경계심에 돌남권원자력의학원 직원들은 노조활동에 무관심했다. 이동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그럼에도 병원을 순회하고 노조 소식지를 건네는 일은 계속됐다. 시간과 노력을 들인 끝에 더디지만 조합원은 늘어났고 단체교섭을 통해 유통기한 지난 삼각김밥과 라면이 제공됐던 열악한 야식 문제를 해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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