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진일 충남노동건강인권센터 대표(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 최진일 충남노동건강인권센터 대표(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이제 2022년도 며칠 남지 않았다. 30명 미만 사업장에 대한 8시간 추가연장노동이 허용되는 시간도 딱 그만큼 남아 있다. 하지만 정부와 여당은 이 시간을 연장시키겠다며 몽니를 부리고 있다. 애당초 소규모 사업장에 대한 유예기간이 끝나는 문제였던 것이 갑자기 ‘일몰제’라는 딱지가 붙어 화물노동자들의 ‘안전운임제 일몰제’와 같이 여야의 협상테이블에 오른 기가 막힌 상황이다.

남은 시간 동안 여야가 어떤 결론을 내릴지는 모르겠으나,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이대로 유예기간이 연장되지 않으면, 계도기간을 연장하면 그만’이라는 고용노동부의 입장이다. 법이 효력을 발휘해도 행정력을 가진 자신들이 처벌을 하지 않으면 그만이라니. 윤석열 정부의 법치주의는 당당하기도 하지. 지금까지의 과정을 돌아보면 정부의 자신감이 어디서 나오는지 금방 알 수 있다. 정부는 그동안 법 개정 없이도 노동시간을 마음대로 주물러 왔다. 수차례 시행규칙을 바꿔 가며 ‘특별연장근로 인가제도’의 대상 업종·기간·사유를 마음대로 조정했다. ‘주 52시간(연장근로 12시간 포함) 상한제’의 구멍은 소규모 사업장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20대 노동자가 기계에 끼여 숨진 중대재해로 그 실태가 공개된 SPC 하청 빵공장의 특별연장근로가 대표적인 사례다. 12시간 주야 맞교대로 운영되던 이 공장의 노동자들은 하루 11시간씩 5일을 근무했고, 일주일 중 하루는 3시간 늦게 출근하거나 조퇴하는 방식으로 52시간을 겨우 맞춰 왔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회사는 올해 사고 전에만 두 차례, 42일에 걸쳐 특별연장근로 인가를 신청했다. 노동부는 이를 승인했고 노동자들은 주당 64시간 일했다. 사실 노동부 스스로 만든 특별연장근로 인가제도 업무처리지침에도 ‘연장근로시간이 과도한 상황에서 다른 대비책 없이 추가로 수주를 받은 경우’ ‘단순 업무의 바쁨이나 연중 상시 업무가 많은 경우’에는 연장근로를 인가해 주지 않는 것으로 돼 있다. 하지만 이 역시 노동부가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지침일 뿐이었다.

2016년 넷마블에서 개발자가 목숨을 잃었을 때 이미 장시간 노동 문제와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포괄임금제의 불법성이 지적됐다. 5년이 지난 지금 정부는 시간을 거꾸로 돌려 ‘구로의 등대’를 다시 밝히라고 주문하고 있고, 포괄임금제는 금지하는 대신 고작 근로감독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노동자들의 과로사를 막고 ‘저녁이 있는 삶’을 위한 법을 두고 노동부 장관은 “저녁이 있기에 앞서, 저녁을 드실 여건부터 갖춰 드려야 한다”며 저임금 장시간 노동으로의 복귀를 종용했다. 하루 8시간 일하면 저녁을 못 먹는 나라는 정상인가? 장관의 이야기를 듣고 지하철에서, 발전소에서 쓰러져 간 김군들이 일에 쫓겨 끼니를 때우던 컵라면이 떠오른 건 나뿐이었을까? 이미 ‘반노동’이 국정기조고 ‘노조탄압’이 국정과제가 돼 버린 이 정부에서 이제는 놀랍지도 않은 일이지만, 따지고 보면 규제가 필요한 것은 노동시간만이 아니라 노동부 자체일지도 모른다.

대통령의 ‘시행령 정치’를 빼닮은 고용노동부의 ‘시행규칙 정치’는 역설적으로 더욱 강력한 법적 규제가 필요함을 보여준다. 이 정부의 기조가 ‘주 52시간 상한제’를 뿌리부터 흔들겠다는 것임은 지난 미래노동시장연구회의 권고안과 그에 대한 정부의 입장을 통해 다시 한번 확인됐다. 언뜻 치열해 보이는 여야의 공방 속에서도 내심 여유만만한 행정부가 함부로 재단하지 못하는 더욱 강력한 노동시간 규제가 필요한 것이다.

정부의 입김은 이미 현장에 닿아 있다. 28일 아침에 방문한 현장에서 한 30대 노동자가 선배 노동자에게 말했다. “형님, 우리 60시간 이런 거 하지 맙시다. 저 이제 그렇게는 못 살아요.” 장시간 노동에 익숙한 선배들이 연장근로에 동의할까 걱정이 된 모양이다. 저녁에 만난 지인은 8+8 주간연속 2교대 근무가 내년부터 8+10(잔업 2시간)으로 바뀐다며 육두문자를 날린다. 이 사업장에도 노동조합은 있지만 그 노동조합은 이런 문제로 감히 회사를 불편하게 한 적이 없다.

얄궂게도 노동자들에게 노동의 시간은 피착취의 시간인 동시에 삶의 시간이다. 단순히 임금의 많고 적음으로 구분되는 문제도 아니며, 노동시간의 많고 적음이나 흔히 말하는 ‘워라밸’로 판단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모든 순간, 모든 시간에 자신이 그 시간의 주인인가. 어떻게 일하고 어떻게 생활할지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가의 문제일 것이다. 노동조합 조직률이 14%에 불과하고, 그나마도 상당수는 위와 같은 노동조합인 세상에서 작은 사업장 노동자들은 그마저도 갖지 못하고 있다. 이제라도 그들에게 그들의 시간을 돌려줄 때가 됐다. 오래전 “5조원을 가진 자본가는 일 년에 천만원 받는 노동자의 50만년을 착취한 것”이라던 시인은 그 시를 이렇게 마무리했다.

“우리들의 투쟁이 돈이 아니라 돈으로 왜곡된 시간이 아니라/ 인간의 시간을 인생의 세월을 되찾는다는 것을/ 틀림없이 확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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