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다혜 변호사(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금속노조 법률원)

“최근 정부가 발표한 중대재해 감축 로드맵이나 거기서 중요하게 언급하는 영국의 로벤스보고서에서도 말하고 있듯, 기업을 규제하고 처벌하기보다 자율과 예방으로 안전보건관리의 방향을 전환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사건 판결에 있어서도 이 점을 고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2018년 12월10일 태안화력발전소에서 홀로 컨베이어벨트 점검 중 사망한 하청노동자 김용균님 사건 관련 형사재판에서 원청인 서부발전측 변호인이 항소심 최후변론에서 한 말이다. 영국의 로벤스보고서를 근거로 삼아, 한 청년의 생을 영영 빼앗은 안전보건범죄의 책임을 덜어보려는 취지의 변론이었다. 1999년 사망한 로벤스 경(Lord Robens)이 들으면 깜짝 놀랄 해석과 적용이다. 명백한 오역이자 오인이다.

이처럼 곳곳에서 로벤스보고서와 자율규제가 제각각 언급된다. ‘자율규제(self-regulation)’는 로벤스보고서가 담고 있는 핵심 주제의식 중 하나다. 로벤스보고서의 권고에 따라 제정된 영국의 산업안전보건법(Health and Safety at Work Act 1974) 이래 영국의 안전보건법제의 기반이 되는 개념이다. 정부는 중대재해 감축 로드맵에서 이를 ‘자기규율 예방체계’로 표현하고 있는데, 로벤스보고서와 유럽의 안전보건체계를 함께 언급하는 것을 볼 때 이 역시도 ‘자율규제’를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self’를 흔히 ‘자율’로 번역해서 쓰는데, 이것이 정확한 번역이 아닌 탓인지, 각자의 이해에 따라 사실상 ‘자의(恣意, 제멋대로)’로 읽는 탓인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로벤스보고서가 말하는 자율규제는 무엇일까.

첫째, 일터 안전보건 관리의 일차적인 책임이 감독기관인 정부가 아니라 위험을 창출하는 당사자인 사업주에게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위험을 통제·관리하고 중대재해를 예방하는 책임 주체로서의 ‘자율(self)’을 말한다. 규범의 내용을 최소한으로 해석하거나 근로감독 등을 통해 지적되는 내용에 타율적이고 수동적으로 응하는 것으로 사업주가 제 역할을 축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매 순간 누가 시켜서 오늘 할당된 문제집 몇 장을 마지못해 풀고 그 흔적을 검사받는 것이 아니라, 미리 제시된 학습목표에 따라 스스로 필요한 공부를 계획하고 그에 따라 학업성취를 하라는 것이다.

둘째, 현장의 위험을 가장 잘 아는 또 다른 주체인 노동자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로벤스보고서는 모든 노동자의 완전한 협력과 참여 없이는 일터의 안전보건을 확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서, 노동자가 자신의 일터에서 필요한 조치를 마련하고 그 이행을 검토·감시하는 데 전적으로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소원수리 수준의 최소한의 형식적인 의견수렴이나 ‘묻지마 서명’으로 채워지는 서류작업이 아니라, 산업안전보건위원회와 같은 노사 공동기구 설치를 확대해 사업장의 안전보건 사항을 논의해 결정하고 노동자 안전대표와 같은 제도를 통해 제대로 된 권한을 부여하라는 것이다.

셋째, 로벤스보고서가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듯 자율규제는 규제완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율규제 시스템을 통해 이전에는 충분히 다뤄지지 못했던 위험을 더 많이 다루도록 해 그 결과 안전보건 기준이 강화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사업주가 선택할 수 있는 조치가 온전히 자의적인 재량에 맡겨진 것이 아니다. 포괄적인 위험성평가를 통해 유해·위험요인을 확인하고 이를 관리하기 위한 조치로서 정부가 제정한 규범을 따르거나 그에 준하는 동종의 다른 조치를 취하는 것이다. 한국경총이 2021년 연구를 의뢰했던 영국의 안전보건 전문가들 역시, 현실적으로 가능한 범위에서 최대한의 보장을 요구하는 목표기반 규제의 안전보건 기준과 책임의 정도가 결코 낮지 않음을 지적한다. 자율규제는 사업주가 안전보건에 높은 수준의 관심을 보이고, 상당한 비용 및 노력을 투입해야 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한국경영자총협회, “영국의 산업안전보건 접근법과 보건안전청의 역할 -역사적 배경, 운영방식, 예방 전략 및 사례-”, 2021. 8.)

넷째, 자율규제는 처벌과 제재를 결코 배제하고 있지 않다. 처벌 없는 자율규제란 노동자의 생명과 건강을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하는 사업주의 희망 섞인 오해일 뿐이다. 자율규제는 노동행정과 근로감독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사전규제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나타나는데, 이때 법령뿐만 아니라 공식 승인된 자율규제의 내용도 함께 고려되고 불이행시 개선통지(한국의 시정조치 명령 등)의 근거로서도 작동된다. 한편 로벤스보고서는 제대로 엄중 처벌해야 하는 경우에 대해서도 별도로 언급하고 있다. 사망 또는 심각한 부상이 발생했거나 발생할 수 있는 명백하고 고의적이거나 무모한 성격을 가진 위반행위 또는 반복적인 위반행위는 보다 강력히 처벌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로벤스보고서와 그에 영향을 받은 영국 및 유럽의 산업안전보건법 체계가 담고 있는 자율규제는, 처벌과 감독을 배제한 규제완화 취지의 자율적(이라고 쓰고 ‘제멋대로’라고 읽는) 안전관리체계와는 분명 근본적으로 다른 내용이다. 널리 통용되는 개념으로서 자율규제를 이해하고 적용하기 위해서 고도의 분별이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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