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민주 공인노무사(공공운수노조 법률원)

지난달 9일 윤석열 정부는 ‘2022 개정 교육과정 행정예고안’을 발표했다. 각 분야에서 많은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지만,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노동’이라는 글자를 각종 문구에서 삭제해 버렸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그간 노동을 사회의 중심에서 배제해 왔지만, 이를 바꾸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고, 여전히 한참 부족하지만 한 걸음의 진전은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현 정부는 한 걸음을 위한 노력마저 무(無)로 만들기 위한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는 단순한 제도 변경의 문제가 아니다. 형식을 넘어서는 사회구조적 본질에 대한 문제이고, 노동관계 전반에 영향을 주는 사안이다.

현장 조합원들에 대한 노동법 교육을 할 때면, 사업장 규모나 직종에 상관없이 조합원들에게 던져보는 질문이 있다. “혹시 집에서 기업을 물려준다고 하지만 현장에서부터 노동의 의미를 배우고 싶어서 노동자가 되신 분이나 집에서 빌딩 몇 채 물려 줄 테니 일하지 말라고 하는데 노동의 의미를 배우고자 이곳에서 일하시는 분 계신가요?”라고. 당연하게도 17년간 만나 본 수많은 조합원 중에 그런 이유로 노동자가 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우리는 그렇게 거의 대부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노동을 하고 대가로 임금을 받는 노동자가 된다. 그리고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존을 위한 필연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생존을 위해 노동하는 자의 권리를 보호하고 기타 노사관계를 규율하는 각종 법령을 통틀어 노동법이라고 부르고, 그중 가장 기본이 되는 법이 근로기준법과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이다. 그러나 두 법 사이에는 노사관계를 어떻게 보는가에 있어서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근로기준법은 개별화된 노동자와 사용자 관계를 기본적으로 불평등한 관계로 설정하고 개별 노동자를 보호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근로조건의 최저기준 설정하기 위해 만들어진 법이다. 근로기준법 4조는 “근로조건은 근로자와 사용자가 동등한 지위에서 자유의사에 따라 결정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지만, 사실 이 조항은 현실에서는 헛소리에 가깝다. 반면 노조법은 노동자를 개인이 아닌 집단으로 바라본다. 집단이 됐을 때 주체가 되고, 사용자와 대등한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는 것을 기본 개념으로 하고 있다. 개인으로서는 사용자와의 관계에서 노사대등 관계라는 설정 자체가 불가능하지만 단결한 노동자 집단인 노조로서만 비로소 노사대등 관계라는 설정이 가능해진다. 그리고 노조법은 헌법 33조1항에서 명명하고 있는 노동 3권을 실현하는 구체적 방식이다.

그러나 미조직 노동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조직된 노동자들조차 노조법이 헌법의 명령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 노동 3권이 당연한 권리라는 점을 모르는 경우가 여전히 많다. 대부분이 노동자로 살아가고 있지만 오히려 경영권·인사권을 더 중요한 권리로 인식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바로 노동이 사회의 중심에 서는 것을 권력과 자본이 원치 않기 때문이다. 사회일원으로 살아가기 위한 기본 교양을 배우는 학교에서 노동자가 됐을 때 어떠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지 배운 적이 없다. 그리고 언론을 포함한 여러 매체를 통해서 사회에 발현되는 노동이라는 글자는 긍정의 이미지보다는 부정의 이미지, 존중보다는 무시의 이미지로 남아 있다. 그 결과 ‘노동자’는 ‘나’와 구별되는 ‘타자(他者)’로 존재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헌법상 권리를 행사하는 것을 ‘포기’한 노동자가 전체의 85%가 넘는다는 것은 너무나 비정상적인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알다시피 근로(勤勞)는 ‘부지런히(勤) 일하다(勞)’는 뜻으로 사용자의 관점에서 사용돼 온 단어다. 반면 노동(勞動·몸을 움직여 일하다)은 노동자의 주체적인 역할을 좀 더 강조한 단어다. 사용자가 시키는 대로 일하고 주는 대로 받던 역할에서, 사회의 주요 구성원으로 성장한 노동자들의 역할 변화를 보여주는 단어라고 할 수 있다. 윤석열 정부가 교과서에서 노동이라는 단어를 삭제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단어 취사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노동자가 헌법상 권리인 노동 3권을 향유하는 것을 방해하고 사회의 주체가 돼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은 막고자 하는 너무나 명백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특성화고 졸업을 앞둔 실습생 신분으로 일한 한 학생은 언론 인터뷰에서 “한 주 100시간 넘게 일한 때도 허다했다. 퇴근 후 자취방에서 잠만 자고 다시 출근했지만 월 급여는 80만원 수준이었다”며 “학교 선생님을 찾아 상담했지만 ‘참고 버텨라’는 말만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에서야 부당한 처우를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됐고 “제대로 된 노동교육을 받았으면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다”고 이야기했다. 이처럼 ‘노동’ 두 글자를 지우려는 자들은 ‘참지 않는 노동자’가 많아질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사단법인 직장갑질119가 진행한 ‘노동조합’에 대한 생각을 묻는 설문에서 노동조합이란 “직장동료에게 노동조합 한다고 말하기 어려운 것” “주변에 숨겨야 할 것 같음”이라는 답변을 본 적이 있다. 사실 어느 정도 예상한 답변이었지만 그 결과를 직접 확인하고 보니 씁쓸하고도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기분이 들었다. 우리가 사회에서 노동, 그리고 노동조합이라는 단어를 말할 것을 금지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결과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윤 정부에서 이것이 더욱 노골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는 노동의 의미와 노동 3권, 그렇다고 우리는 이 권리를 포기할 수 없다. 포기하지 않기 위해서는 ‘노동’을 말하는 것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개별로서는 어렵다. 집단이 된 노동자가 될 때 진정 가능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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