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진일 충남노동건강인권센터 대표(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군필 남성 대부분이 잊을만하면 한 번씩 군대에 다시 가는 악몽을 꾼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웃픈 이야기일 것이다. 고백하자면 현역병 생활을 한 적이 없는 나에게도 이와 비슷하게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악몽이 있는데, 다름 아닌 컨베이어에서 일하면서 떠밀려가는 꿈이다. 컨베이어 속도에 맞춰서 일하다가 제시간에 작업을 마무리하지 못해 내가 만들던 차량에 떠밀려가고, 겨우 수습하고 돌아서면 다음 차량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는 상황은 꿈속에서도 여전히 진땀 나고 불쾌하기 짝이 없다. 공장을 떠난 지 제법 되었건만, 10여년간 컨베이어 속도에 통제당하는 노동의 경험은 뇌의 한구석에 ‘압박과 불안’으로 각인되어있는 모양이다. 군인에게도 노동자에게도 자기 삶의 순간들과 노동의 과정들에 대한 자기 통제권을 잃는 것은 영혼에 생채기를 내는 경험일 수밖에 없다.

이처럼 자동차 1대당 1분이라는 작업시간을 노동자가 어찌할 수 없다는 것만으로도 몸과 마음에 상흔을 남기는데, 그 통제할 수 없는 요소가 다름 아닌 노동시간 전체라면 어떨까? 오늘 몇 시에 퇴근할지, 이번주에는 며칠이나 근무하는지 알 수 없다면? 팀장이 갑자기 “오늘부터 1주일간 철야”라고 외친다면? 과로와 불규칙한 노동으로 인한 당장의 육체적인 부담은 말할 것도 없고, 정상적인 여가생활과 재충전은 불가능할 것이고 이로 인한 스트레스, 가정생활과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문제들까지. 그야말로 생활이 엉망진창으로 무너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안타깝게도 한국에는 이미 이런 조건과 상황에서 노동하고 있는 이들이 많이 있지만, 더 많은 노동자들의 삶을 파괴하고 싶어 하는 자들도 있다.

지난 17일 미래노동시장연구회라는 임의단체가 노동시간 법제 개편안을 중간 발표했다. 법정 기구도 아니거니와 그 흔한 노사정협의기구조차도 아닌 미래노동시장연구회가 노동시간 법제 개편안을 제출하는 것부터 어불성설이지만,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윤석열 정부의 노동시간 유연화 기조가 어떤 해악들을 초래할지 예상해 볼 수 있다. 개편안의 제목은 ‘노동시간의 자율적인 선택권 확대 방안’이지만 실제 내용은 1주일(연장근로 12시간 포함 최대 52시간) 단위로 정해진 관리단위를 월 단위 이상으로 늘리고, 근로시간저축계좌제를 도입해 연장수당 대신 휴가를 부여하며, 고소득 전문직 노동자는 노동시간을 규제하지 않는 방안 등을 포함하고 있다. 과연 이러한 개편이 제공하는 ‘자율적 선택권’은 노동자의 것일까, 사용자의 것일까.

주 40시간제가 시행된 지도 한참이 지났지만 얼마 전 양대 노총 조합원 2천6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절반이 넘는 노동자들이 현행 노동시간 체제가 ‘주 52시간’이라고 답했다. 현실에서는 주당 52시간을 꾹꾹 눌러 담아 일하고 있고, 합법적 또는 불법적으로 주 52시간을 초과하는 노동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계청의 사회조사 결과를 보면 근무시간 만족도는 2006년부터 2017년까지 28% 선에 머물다가 2018년부터 유의미하게 상승해 2021년 38.2%에 이르렀다. 52시간 상한제가 부족하나마 노동시간을 단축시켰고 그로 인한 삶의 질 향상도 확인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연구회의 월 단위 관리기준에 따르면 주당 노동시간은 최대 91시간까지도 가능하다. 겨우 자리 잡고있는 주 52시간의 노동시간 상한을 완전히 무력화하겠다는 것이다.

연구회가 주장하는 ‘자율적 선택권 확대’는 결국 노동시간 유연화에 대한 경영계의 요구, 주당 120시간도 일할 수 있게 하고 싶다는 윤석열 대통령의 염원을 실현하기 위한 구실일 뿐이다. 이러한 유연화가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주당 60시간이 넘는 일상적인 과로, 납기나 물량에 따라 발생하는 단기간의 집중적인 업무로 인한 단기 과로, 상황에 따라 사업주 마음대로 정하는 예측하기 어려운 근무일정과 불규칙한 노동시간, 제대로 된 휴일이 없는 월화수목금금금 같은 방식으로 드러날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들은 과로사를 비롯한 뇌혈관 질병 및 심장 질병의 산재인정기준에 포함된 바로 그 내용들이다. 뒤집어 말하면 연구회의 주장은 충분히 확인되고 증명된 과로사 위험요인들을 노동현장에 널리 확대시키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자율적 선택권’이 노동자의 것이 되지 못하는 이유, 주 52시간의 규제가 그나마 효과를 나타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결국은 현실에서 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시간을 통제할 권리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연차도 마음대로 못 쓰는 대다수 사업장의 노동자들, 불법적 포괄임금제가 버젓이 작동하는 사업장의 노동자들에게 근로시간저축계좌는 본인 계좌가 아니라 사업주의 대포통장일 뿐이다.

최소한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 최저임금을 정하는 것과 똑같은 이유로 최장 노동시간은 규제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규제는 고무줄처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의 몸과 마음이 최소한의 항상성을 유지할 수 있는 방식, 노동과 삶이 최소한의 안정성을 유지할 수 있는 방식이어야만 한다. 이러한 바탕 위에 포괄임금제의 완전한 근절부터 시작해 노동시간에 대한 노동자 개인의 결정권, 노동자집단의 교섭권을 실질적으로 확대해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노동시간의 자율적인 선택권 확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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