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건준 아유 대표

비하로 이끈 경제라인

10월 중순, 몇몇 언론이 조용한 퇴사에 대해 보도했다. 임금을 받는 만큼만 일하다 조용히 떠나는 젊은 직장인과 그에 대응해 사용자도 조용한 해고를 선택한다고 했다. 애착이 없으니 근면 성실할 이유가 없고 적당히 일하다 조용히 그만두는 것이 당연한 세태일까. 11월, 미국의 트위터와 아마존에서 해고가 시작됐다. 이 뉴스는 떠들썩하게 전 세계에 퍼졌다.

경부선을 타면 부산, 호남선을 타면 광주, 영동선을 타면 동해안에 이르듯 노동도 어떤 길을 달리는가에 따라 도착지가 달랐다. 노동이 가장 먼저 내달리는 곳은 경제라인이다. 생협이나 사회적기업이 조금 있지만 ‘경제=시장경제’다. 시장은 지구별 모든 것을 상품으로 만드는 마법을 부려 왔다. 몸에 붙은 노동을 상품으로 만들 때는 몸에 붙은 인격을 일단 접어 두는 것이 핵심 포인트다. 노동은 그렇게 경제라인에 들어선다.

4차 산업혁명 기치를 내달리는 지금, 늘 그랬듯 노동을 더 싸게 더 오래 쓰려는 자들은 더 가열차게 노동시민을 무권리 지대로 밀어낸다. 아니꼬우면 신박한 창업 혹은 대박 투자를 하시라. 별수 없으면 당근마켓에 내놓은 헌 물건 보다 안 팔려도 노동시장에 나를 내놔야 생존한다. 노동시장 상층을 차지한 사람도 있지만, 생존 노동을 하는 사람에게 행복 추구권 따위는 헛소리다. 숱한 노동시민은 인권 목록 밑바닥의 생존권 언저리를 맴돈다. 경제라인을 달려온 노동의 슬픈 종착역이다. 서둘러 실망하지 말자. 다른 라인이 있다.

뻥친 정치라인

마고 할머니를 비롯해 세계 곳곳에 세상을 창조한 다양한 신화가 있었다. 이 모든 신을 뒤로 밀어내며 유일신으로 등극하신 하느님께서 세상을 만들었다는 창조론에 누가 감히 도전하랴. 발칙하게도 노동이 덤볐다. 하느님이 창조하는 것은 본 적이 없고 노동으로 모든 물건을 만들지 않는가. 만물의 창조자는 노동이며 노동계급이 사회 역사의 주인이니 노동을 찬양하라.

신의 반열에 오른 노동을 감히 착취하는 자본가의 신성모독을 어찌 가만두랴. 국가권력을 장악해 자본가를 타도하자. 영웅적 노동계급은 혁명을 향해 진군했다. 20세기에 노동은 정치라인을 타고 용암처럼 뜨겁게 올라 화산처럼 폭발했다. 혁명 권력은 노동자 국가를 선포하고 노동을 최고 반열에 올려 노동 이데올로기를 구축했다. 노동계급은 특권적 지위를 누리며 노동해방을 만끽했을까. 특권을 차지한 것은 노동자가 아니었다. 우리 모두 안다. 망했다.

20세기 초부터 혁명가들은 경제주의를 넘어 정치투쟁으로 나가자고 선동했다. 이런 정치우선주의는 다양한 모습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미 경제를 장악한 부자와 보수세력은 크고 유능한 정부보다 다루기 쉬운 작고 무능한 국가를 원한다. 경제를 장악하지 못한 진보세력은 국가권력을 부자를 통제할 수단으로 생각하기에 정치에 더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에게 정치는 권력투쟁이다. 이들에게 정치와 경제 개념은 분명한 반면 사회는 안중에 없다. 사회 없는 사회주의는 사라졌다. 그것이 노동자 천국이었다고 믿을까. 그런 나라 노동자들이 행복했다면 사라졌을까. 이것이 국가권력으로 이어진 정치라인을 탔던 노동의 종착역이다.

다정한 사회라인

다른 길은 없을까. 차별하지도 않으며 특별 대우도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존중하며 더 안전하고 더 즐거운 노동으로 가는 길은 없을까. 사회라인이 있다.

사회라는 말은 자주 쓰는데 그게 뭔지 물으면 모호하다. 단순하게 보자. 정당이 권력을 향해 선거를 무대로 뛰는 것이 정치다. 기업이 돈을 벌려고 시장을 무대로 뛰는 것이 경제다. 시민이 서로 존중하며 어울리는 공간이 사회다. 일터의 노조나 다양한 시민단체를 비롯해 사회는 일상에 있다. 애정으로 이뤄진 가족, 우정으로 만나는 친구, 추억을 쌓는 다양한 친목 모임이 있다. 기업에서 상처받고 국가가 지켜 주지 못할 때 가족·연인·친구·동료가 위로한다. 동등하게 어울리며 서로를 위로하는 사회가 우리의 최후 보루다.

무노조 기업은 소유자의 힘과 이익이 우선이지만 탄탄한 노조가 생긴 기업에는 권리가 공존한다. 이렇게 힘과 이익이 지배하는 공간을 서로 존중하는 공간으로 바꾸는 것이 사회라인이다. 돈이 없어 가난하다는 착각이 아닌 권리가 없어 궁핍하다는 자각이 필요하다. 권리가 넘치면 특권이 되고 부족하면 생존에 허덕인다. 4차 산업혁명으로 특권층은 막대한 이익을 차지하고 플랫폼 노동자들은 권리 사각지대로 밀려나고 있다. 이런 특권과 권리 사각지대를 없애는 것이 사회라인이다.

인류는 1차에서 4차 산업혁명까지 자연을 착취하는 특권을 누렸다. 지구 생명체들은 멸종위기로 치달으며 모든 권리를 빼앗기고 있다. 지구별은 팬데믹과 기후위기를 통해 특권을 누린 인류에게 강렬하게 경고한다. 그러나 여전히 경제는 자연을 착취하고 권력은 지구를 수탈한다. 사회는 생태계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사회를 지구별 공동체로 확장하고 강화해야 한다.

양파를 벗어나 삼위일체로

정이 흘러야 할 가족이 이익에 휩싸이면 재산 싸움으로 원수가 되듯, 친구 사이에 이권이 끼면 우정은 깨지고 이익 경쟁자가 되듯, 다정한 사회를 이익이 지배하면 비정한 곳이 된다. 가족을 꼰대가 지배하면 가부장제 공간이 되듯, 사랑하는 연인 사이를 힘이 지배하면 데이트 폭력 같은 끔찍한 상태로 변하듯, 다정한 사회를 권력이 지배하면 비정한 곳이 된다.

경제가 사회를 집어삼킨 곳이 자본주의다. ‘경제 우선주의’에 빠지면 성장해도 가진 자들이 더 가지고 수축할 때도 없는 사람만 죽어난다. 이익을 앞세우다 ‘돈뽕’에 중독된 경제파의 세상이 자본주의다. 정치가 사회를 집어삼킨 것이 국가 사회주의였다. ‘정치 우선주의’에 빠지면 권력만 강해진다. 권력을 앞세우다 ‘국뽕’에 취한 정치파의 세상이 망한 사회주의였다. 양파를 넘자. 생명과 권리가 먼저인 사회를 키우자.

사회를 누가 키울까. 돈 많은 사람에게는 경제라인이 탄탄대로다. 경제도 중요하지만 통제를 벗어나면 사회를 착취하는 괴물이 된다. 빽 있는 사람에게는 정치라인이 성공가도다. 정치도 중요하지만 통제를 벗어나면 사회를 억압하는 괴물이 된다. 평범한 시민에게 사회라인이 다정한 길이다. 사회는 충만한 일상을 위해 필요하지만 찌그러들면 불안과 고독의 늪이 된다.

사회가 풍성할 때 사회·경제·정치와 노동시민·기업가·정치가가 앙상블을 이룬다. 대박 나거나 떵떵거릴 것 없는 보통 시민에게 경제‘성장’이나 정치‘성공’보다 사회‘성숙’이 소중하다. 그래서 노동의 길은 정치화보다 사회화며 세력화보다 자력화다. (정치)세력화에 혹하지 말고 스스로 권리를 지키고 넓히자. 챙길 것은 중심보다 주변이다. 대통령과 국회 등 먼 중심보다 산업과 지역 등 주변을 챙기자. 노동이 향할 곳은 광장보다 현장이다. 현장을 바꾸지 못하는 광장 집회는 정치적 동원으로 타락한다. 대전환을 이룰 새로운 광장은 체제의 마디마디인 삶의 현장과 상호작용을 하면서 응축되다가 불쑥 나타날 것이다.

여기저기서 대전환을 말한다. 정치와 경제만이 아니라 갈라진 광장의 촛불과 태극기, 진영논리가 된 진보와 보수, 패거리가 된 양당체제, 갈등이 고조되는 남북, 격해지는 친중과 친미 등 자꾸 세상이 양파로 나뉜다. 여기에 비전 없다. 관성대로 내달리며 전환을 말하는 것은 망상이다. 경로를 바꾸자. 우리는 양파가 아니다. 정치·경제 두 라인을 넘어 사회라인을 타자.

아유 대표 (jogju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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